公文에 치인 公교육

  • 입력 2009년 6월 22일 02시 56분


교사들 ‘이벤트성’ 공문 처리하느라 수업준비 부담

“30∼50%는 교육과 무관”… 마감쫓겨 수업못하기도

서울 모 중학교 A 교사(45·여)는 17일 오전 경기 가평군에 있는 한 수목원을 걷고 있었다. 1학년 학생 전체와 함께 체험학습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

“선생님, 갑자기 죄송합니다. 서울시의원 이름으로 공문이 내려왔는데 오늘까지 처리해 달라고 해서요.” A 교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던 학생들을 먼저 보내고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내 책상에 보면 서류 파일이 있어요. 네, 주황색요. 아마 10쪽에 보면 작년도 우리 학교 통계가 있을 거예요. 그 숫자 정리해서 보내면 돼요.” 애써 웃으며 아이들 곁으로 돌아갔지만 금세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선생님, 3년간 자료를 정리하라는 건데 제가 공문 내용을 잘못 말씀드렸습니다.”

전화로 20분 가까이 설명한 뒤에야 겨우 공문 처리가 끝났다.

이튿날 아침은 평소보다 더 분주했다. 1, 4, 6교시에 있던 수업을 3교시까지 몰아서 했다. 오후에 수업공개를 참관하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점심도 거르고 처리해야 할 공문도 있었다. 공교롭게 학생 한 명이 3교시 수업 도중 손을 다쳤다. 다친 학생보다 공문이 더 걱정이었다. A 교사는 병원에서 곧바로 인근 학교로 향했다.

수업공개가 끝나고 모처럼 만난 사범대 동기와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었다. 학교로 돌아와 컴퓨터 모니터로 공문을 보니 갑자기 피로가 엄습했다. ‘기초 학력 미달 학생을 잘 지도하라’는 공문. 순간 A 교사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공문 때문에 실력이 부족한 학생을 가르칠 준비를 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걸 알기는 할까.’ A 교사는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공문 처리를 시작했다. 공문 마감은 매일 오후 4시 반이다.

A 교사는 토요일에도 오후 6시가 다 돼서야 집에 도착했다. 초등학교 교사인 남편은 ‘이제 왔느냐’고 짧게 인사한 뒤 부엌에서 나올 줄 몰랐다. 남편은 콩을 가느라 바빴다. 과학 시간에 두부를 만들기 위한 준비물이었다.

“아니, 학교에서 보조 선생님이랑 같이 하지 그래요? 벌써 갈아 두면 상할지도 모르는데….”

“교육청에서 발표 대회가 있어서 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여유가 없어요. 시간 있을 때 해야죠.”

“큰 학교도 별 수 없구나. 난 우리 학교가 선생님이 적어서 잡무가 많은 줄 알았더니. 저도 지금부터 월요일에 애들이 써 낸 독후감 읽고 수상자 3명 뽑아야 해요.” A 교사는 눈짓으로 학교에서 가지고 온 쇼핑백을 가리켰다.

“이번 주에 공문 몇 개나 내려왔어요?” 남편이 안쓰러운 듯 물었다.

“처리한 건 8건. 혼자 계산해 봤더니 이번 주에 15시간을 공문 처리하는 데 썼더라고요. 내가 수업 없을 때 이 교실 저 교실로 전화를 걸면서 물어봐야 하는데 아이들 수업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난 이상하게 이번 주에 구에서 내려온 공문이 많더라고요. 결국 그게 다 ‘이벤트 성격’이 강한데 그렇다고 보고 안 할 수도 없어서….”

“e센스(교육 전자 결재 시스템)가 도입되면서 일이 더 많아진 것 같아요. 위에서는 컴퓨터로 하니까 금방 처리할 수 있는 줄 아는데 양 자체가 너무 많아요. 공문 처리 많이 한다고 평가 때 점수 더 주는 것도 아닌데….”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전국 교사 57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공문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이상 수업을 빠진 경험이 있는 교사는 68.9%였다. 일주일에 공문을 한 건도 처리하지 않았다고 답변한 교사는 1%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공문의 내용은? 전체 공문 중 30∼50%가 교육 활동과 무관한 내용이라는 것이 교사들의 답이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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