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습니다. 돌이에요.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23일 오전 경기 의왕시 모락산 중턱. 산비탈에서 땅을 파다 삽 끝에 무언가 ‘딱’ 하고 부딪치는 소리에 당황한 기자를 한 육군 장병이 안심시켰다. 땅을 파던 곳은 6·25전쟁 때 한국군이 중공군의 총탄을 피해 몸을 숨기던 참호였다. 기자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장병들과 함께 이곳에 파묻혀 있을지 모를 전사자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유해발굴감식단 발굴2팀은 육군 51, 55사단과 함께 6월 초부터 모락산 능선을 따라 유해 발굴 작업을 해오고 있다. 모락산은 1951년 중공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김성수 발굴팀장(중사)은 “유해는 전쟁 당시 팠던 참호에서 주로 발견된다”며 “현재 모락산에서 1100여 곳을 파내 유해 18구를 수습했다”고 밝혔다. 기자는 이날 ‘1일 유해발굴단원’으로 이 작업에 참여했다.》
경기 모락산 중턱 산비탈 중공군과 싸우던 참호 즐비
“대나무칼로 조심조심 작업 흙 긁어내자 두개골 드러나
전투화 안엔 발가락 뼛조각…젊은 용사 생각에 가슴먹먹”
○ 50여 년 만에 빛을 본 호국영령
낮 12시. 등산로에서 3m 정도밖에 벗어나 있지 않은 834번 구덩이 앞으로 유해발굴감식단 단원들이 모였다. 전날 철모와 허벅지 뼈, 탄피 등의 유해가 조금 드러난 현장이었다.
이내 두개골이 붙어 있는 철모가 형체를 드러냈다. 단원 3명이 달라붙어 이 철모를 밖으로 옮겼다. 주위에서는 “조심, 조심”을 연발했고 단원들은 아기를 내려놓듯 살며시 한지 위에 철모와 두개골을 올려놨다. 기자는 대나무 칼로 철모와 두개골 사이의 좁은 틈에서 흙을 긁어냈다. “두개골을 세게 잡으면 뼈가 으스러질 수 있다”는 단원의 말에 손이 떨렸다.
철모를 떼어 내자 두개골의 형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50여 년 만에 햇빛을 보는 호국영령의 유골이었다. 손 위에 올려진 유골을 보면서 이곳에서 나라를 지키다 고통 속에 숨졌을 젊은 용사가 떠올랐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김법중 51사단 발굴팀장(원사)은 “그 선배님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을 수 있다. 그 고귀한 충혼의 넋을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 마지막까지 신중하게
유해 수습을 시작한 지 20분이 되지 않아 작업이 잠시 중단됐다. 또 다른 전사자의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10여 분 뒤 세 번째 전사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도 나왔다. 가로 세로 각 1m 정도의 작은 구덩이 안에서 세 구의 시신이 이리저리 엉켜 있었다. 뼈를 둘러싸고 있는 전선도 함께 발견됐다. 해가 산기슭으로 내려오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지만 단원들의 손길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한 조각의 뼈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기자가 흙이 가득 찬 전투화 안에서 흙을 빼내자 작은 뼛조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발가락뼈들이었다. 이를 지켜본 한 단원은 “전투화 가죽 속에서 발만 썩어 사라졌다”며 “그저 쉽게 지나치는 등산로 옆에 이렇게 무명용사들이 썩어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라고 말했다.
유해 수습을 시작한 지 5시간이 지나서야 유골 3구와 탄피, 전투화, 숟가락, 야전삽 등 100여 점의 유품을 땅 위로 꺼내 올릴 수 있었다.
○ 마지막 한 구의 유해까지
국방부는 10년째 발굴 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지만 아직도 찾아야 할 유해가 많다. 이용석 발굴과장(중령)은 “유해가 훼손될 수 있어 중장비 없이 일일이 삽으로 파내야 하는 탓에 작업에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발굴단원인 이상민 상병은 “몇 시간 동안 산을 올라 서 있기조차 힘든 비탈길에서 유해를 수습할 때도 있지만 역사의 비극을 치유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힘을 내게 된다”고 말했다. 유해 수습을 마무리하면서 한 단원이 발굴된 유해와 유품을 들여다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 산에 묻힌 마지막 선배님 한 분까지 모두….”
의왕=류원식 기자 rew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