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까지 607명에 불과했던 국내 입국 탈북자가 20년 만에 1만6354명(2009년 6월 현재)이 됐다. 통일부는 2010년이면 탈북자 2만 명 시대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탈북자가 한국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달 ‘새롭고 하나 된 조국을 위한 모임’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의 58.4%가 여전히 자신을 ‘북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을 ‘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6.3%에 불과했다.
이런 이질감은 무엇보다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머물면서 사회적, 문화적 적응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직업적 성공과 안정이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공존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북자로서 성공적으로 한국 사회에 적응한 이들의 경우는 무엇이 달랐을까. 예술가, 전문직, 샐러리맨, 사업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북자 10명을 인터뷰해 이들이 꼽는 성공 요인 5가지를 살펴봤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1] 한국화하라 - 북한적인 것 버리되 개성은 살려야
○ 북한에서의 재능-지식을 ‘한국화’하라
김철웅 백제예술대 교수(35)는 북한에서 평양 국립교향악단 수석피아니스트로 활동한 엘리트 음악가다. 그는 2003년 한국에 온 이후에도 매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한국에 정착해 올해 4월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주했고 8월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콘서트를 열 예정이다.
그러나 그의 성공이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김 교수는 북한도 남한도 아닌 ‘우리의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해 오랜 시간 고민했다고 털어놓았다. 그 결과 아리랑을 새로 편곡한 ‘아리랑 소나타’를 탄생시켜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탈북 예술가들은 탈북자라는 이유로 눈길을 끌지만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한국에서 인정받는 예술을 하지 못하면 곧 잊히고 만다”고 말했다.
2004년 탈북한 장진성(가명·37) 씨는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101연락소에서 북한 체제 찬양, 대남 선전·선동 작가로 인정받은 사람이다. 그는 이런 경험을 역으로 살려 북한의 독재를 고발하는 시집(‘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를 잇달아 펴냈다. 그는 “권위주의, 경계심, 피해망상 등 북한적인 모든 것을 버리되 직업적 천성과 기량만은 한국화해 개성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허황된 꿈을 갖기보다는 북한에서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게 장 씨의 충고다.
[2]계속 도전하라 - 눈-귀 열고 새로운 사회- 문화 적응을
○ 새로운 기술과 공부에 도전하라
제빵 전문가인 김영미 현대호텔관광 직업전문학교 교사(34)는 2005년 한 직업전문학교에서 제빵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공부에 탈북자 동료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야간 전문대학의 호텔제과제빵과에 입학해 한국 학생들의 따가운 시선과 편견을 뒤로한 채 공부에 열중하자 어느새 흥미가 생겼다. 제빵기능사 등 제빵 관련 자격증 4개를 잇달아 땄다.
탈북을 소재로 한 영화 ‘크로싱’의 김철용 조감독(35)은 2001년 한국에 온 뒤 북한 사회의 참상을 영화로 보여주겠다고 결심했다. 북한의 기동예술선전대에서 잠깐 연극배우 생활을 했지만 한국 영화계의 진입 장벽은 높기만 했다. 그는 연극영화과(한양대)에 진학했다. 2002년부터 4년간 강의를 전부 녹음해 다시 들었고 학과 동기들이 추천해주는 책과 영화는 빠짐없이 보고 읽었다. 그 결과 4학년 때 탈북을 다룬 영화 ‘국경의 남쪽’ 연출부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장호남 근로복지공단 대리(42)는 2002년 탈북자 정착교육 시설인 하나원에서 나왔을 때 많은 탈북자가 배우는 컴퓨터로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힘들지만 다른 사람이 잘 하지 않는 공부를 하자”고 결심했다.
그는 화학공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해 제조업체의 환경 실태를 조사하는 기업에서 일했고 능력을 인정받아 공단에 취직했다.
[3]다가서라 - 봉사활동 적극 참여… 어느새 한식구로
○ 한국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어울려라
북한에서 특별한 직업을 가졌던 사람만 남한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것은 아니다. 1994년 한국에 온 엄모 대우건설 과장(52)은 제철소 노동자 출신이다. 1995년 그는 대우건설 원주사업소의 용접공이었다. ‘이렇게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집념으로 7년간 용접공으로 열심히 일한 덕분에 그는 2002년 대우건설 본사로 발령받았고 지난해에는 경영지원팀 과장으로 승진했다.
영어와 컴퓨터 사용법조차 제대로 몰랐던 그에게 본사 생활은 또 다른 난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눅 들지 않고 선후배, 동료에게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갔다. 등산동호회와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해 회사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어느새 ‘탈북자 출신’이 아니라 대우건설 직원 중 한 사람이 돼 있었다.
함흥컴퓨터기술대 교수였다가 2004년 한국에 온 김흥광 경기대 겸임교수(49)는 2007년부터 학생들에게 정보보호 관련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북한에서 정보기술(IT) 전문가로 통했지만 한국의 IT 학계가 자신을 불러주기만 기다리지 않았다. 학회, 학술세미나, 심포지엄에 먼저 참가해 학자들과 교류하며 인맥을 넓혔고 여러 대학의 강사, 외래교수직에 지원해 자신을 알렸다.
[4] 잊어라 - 북한에서 잘나갔더라도 ‘걸음마’부터
○ ‘내가 북한에서 어땠는데’ 이런 생각을 지워버려라
김흥광 교수는 북한에서 이미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년간 대학교수를 지냈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600만 원을 들여 한국정보보호진흥원의 특별교육과정에서 컴퓨터를 다시 배웠다. 그는 “북한에서 교수였다고 남한에서도 처음부터 교수 행세를 했다면 분명히 실패했을 것”이라며 “눈높이를 낮춰 귀와 눈을 열어야 남한 사회의 문화에 적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철웅 교수도 “북한에서 아무리 뛰어난 음악가였다 하더라도 남한에서는 나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실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엄 과장은 용접공 일을 시작했을 때 사무직으로 취직한 다른 탈북자들이 “용접하려고 남한 왔냐”며 비아냥거렸지만 결국 그런 사람들은 얼마 못 버티고 회사를 그만뒀다고 전했다. 그는 “탈북자들이 ‘왜 내 월급이 이렇게 적나, 왜 나만 이렇게 힘든 일을 시키나’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김철용 조감독은 “북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한국 땅에 들어서는 그날 태어난 아기라는 생각으로 다시 배워야 한다”며 “한국도 돈을 쥐여주기보다 적성과 원하는 직업을 찾을 때까지 직업을 계속 소개해주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5] 어필하라 - 한국사람 취향 파악해야 길이 보여
○ 한국 사회의 취향에 어필하라
이영일 웰빙자연영농조합 사장(51)은 북한의 특산물인 목이버섯 종자를 지리산 목이버섯 종자와 교잡해 한국 기후에 맞는 목이버섯 종자를 만들었다. 이 기술을 바탕으로 버섯 시장에 진출해 이제는 연 매출액 100억 원에 달하는 회사의 대표가 됐다.
그는 우연히 목이버섯 종자를 가지고 탈북했지만 처음에는 이 종자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몰랐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웰빙 열풍에 건강식품을 찾는다는 것을 알고 나서 무릎을 쳤다.
2006년 한국에 온 한모 씨(37)는 2007년 서울 은평뉴타운 아파트 단지에 슈퍼마켓을 낸 뒤 고민에 빠졌다. ‘탈북자가 운영한다고 발길을 돌리지 않을까.’ 그는 부지런함과 신선함으로 편견을 불식하기로 했다. 매일 서너 시간만 자고 새벽마다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내놓았다. “탈북자 사장님이 더 부지런하고 친절하다”는 평판을 얻으며 손님이 늘었다.
최영희 남남북녀결혼컨설팅 대표(40)는 2002년 한국에 온 뒤 한국 남성과 몇 번 선을 보다가 탈북 여성과 한국 남성을 맺어주는 일이 수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일을 시작한 건 아니다. 대형 결혼정보회사에서 일을 배웠다. 결혼정보회사에 회원으로 가입한 뒤 선을 보며 시장조사도 한 끝에 2005년 회사를 차렸다. 탈북자가 운영하는 최초의 결혼정보회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