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 후 충치 치료에만 200만 원을 썼습니다. 잘못된 양치 습관 때문에 비싼 비용을 치른 거죠. 그래서 서울 시내 초중고교에 학생들이 칫솔을 보관할 수 있는 살균기를 설치할 것을 제안합니다.”
24일 오후 3시 서울시청 13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17회 천만상상 오아시스 실현회의’. 아이디어 제안자인 건국대 행정학과 3학년 라병훈 씨가 발표를 마치자 시민평가단인 상상누리단 회원들이 각각 ‘○’와 ‘×’가 적힌 푸른색 푯말을 들었다. 언뜻 경매장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푯말은 아이디어의 참신성을 평가하는 기준이다. 결과는 ○ 2개에 × 8개. 10명 중 2명만 참신하다고 봤다.
저조한 성적에 대한 시민토론단의 반박이 이어졌다. 신승철 건국대 치과대 학장은 “충치 예방을 위해선 밥 먹고 난 뒤에 이를 바로 닦는 게 가장 간단하고도 정확한 방법”이라며 “살균기뿐 아니라 세면시설도 2배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임상예방치과학회의 한 회원 역시 “한국은 노인 대다수가 의치에 의존하는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에 비해 충치 문제가 심각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남승희 서울시 교육기획관은 “한두 번의 시범 사업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범정부적 차원에서 아이들의 위생 상태 향상을 위해 살균기뿐 아니라 상수도시설을 늘려야 한다”며 좋은 제안이라고 답했다.
○ 회의라기보다는 행사
기자가 직접 참관한 제17회 천만상상 오아시스 실현회의는 딱딱한 회의라기보다는 하나의 활기찬 행사를 연상시켰다. 이날 회의에는 ‘학교 내 칫솔살균기 설치’ 외에도 버스정류장에 안내용 터치스크린 설치하기, 온실가스 감축 인증기업 제품 구매 시 포인트를 적립해주는 ‘그린 마일리지 카드’ 제도, 사회단체나 기업 명의로 된 공원 만들기 프로젝트, 2차원(2D) 대신 3D 설계도면을 활용한 공사비용 줄이기 등 시민들이 제안한 5가지 안건이 올라왔다.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각각 미리 준비해 온 프레젠테이션을 성의껏 선보인 5명의 평범한 시민 외에도 서울여대 홍보동아리 학생들과 한양대 건축과 교수 및 학생, 숙명여대 환경봉사단,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 학생 등 160여 명도 토론 패널로 참가했다. 일부 여학생은 갑작스러운 카메라 세례에 긴장한 듯 말을 잇지 못하거나 목소리를 떨기도 했지만, 안건에 대한 의견을 차근차근 제시하는 모습이었다.
○ 청혼의 벽 아이디어도 여기에서
시민들의 일상 속 아이디어를 시 정책으로 활용하자는 취지에서 2006년 10월 시작된 천만상상 오아시스 프로젝트에는 올해 5월까지 3만3000여 건의 아이디어가 제안됐다.
아이디어들은 누리꾼과 시민 댓글을 통해 평가를 거쳐 실현회의 안건으로 올라와 정책 반영 가능성을 검토받는다. 청계천 명물로 자리 잡은 ‘청혼의 벽’과 지하철 교통카드 기부시스템 등 106가지 아이디어가 실제 정책으로 채택돼 사업이 완료됐거나 진행 중이다. 2개월마다 열리는 실현회의에 안건으로 상정되려면 평균 1000 대 1을 뚫어야 할 정도. 이번 회의를 앞두고도 6, 7월 두 달간 총 5579건이 접수됐다.
그렇다고 해서 제안되는 아이디어들이 꼭 거창한 것만은 아니다. 비록 안건으로 상정되지 못했지만 이날 역시 실생활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온 시민들의 아이디어가 여럿 소개됐다.
한국어와 영어로만 서비스되는 지하철 승차권 자동발매기에 중국어와 일본어를 추가하자는 아이디어는 다음 달부터 현실화된다. ‘신발이 젖기 쉬운 비 오는 날엔 지하철역에서 슬리퍼를 나눠 주세요’ ‘현재 종로구 소속인 동대문을 동대문구에서 사들이면 안 되나요?’ 등 실현되기엔 어렵지만 반짝이는 제안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