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의 시작
『…(전략)…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고등학교 문학, 김소월 ‘초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말로 못할 정도의 비통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는 그 이름을 부르다가 내가 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는 그를 만나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없어서 안타까운 것이다. 즉 ‘죽음은 단절’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 다른 생각
그런데 죽음은 ‘단절’이 아닐 수도 있다.
『뭐락카노, 저 편 강기슭에서 /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
뭐락카노 뭐락카노 /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 니 흰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
오냐. 오냐. 오냐. /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
뭐락카노, 저 편 강기슭에서 /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
오냐. 오냐. 오냐. /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고등학교 문학, 박목월 ‘이별가’]』
동아 밧줄처럼 질겼던 인연이 끝나고 저승으로 건너간 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던 화자는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라고 말한다. 이제 이승에서의 인연은 끝이 났지만 ‘나중에 내가 죽어 저승에 가면 너와의 인연이 다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영원한 단절이 아니며, 단절이라 하더라도 곧 다시 이어질 수 있는 일시적인 단절일 뿐이다.
○ 그런데…
왜 살아있는 사람은 자꾸 죽은 이를 생각하고 되새기는 것일까? 단지 슬프기 때문일까? 슬픔은 들추고 떠올릴수록 더 커질 수 있는데, 마치 상처가 덧나듯이.
『견우 직녀도 만나게 하는 칠석날 /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땅에 묻고 돌아오네. /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 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 (중략) …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고등학교 문학, 도종환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평생 고생만 시킨 아내, 제대로 된 옷 한 벌 사주지 못해 미안한 아내가 죽었다. 그를 떠나보내며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안개꽃 몇 송이와 수의(壽衣)뿐이다. 이럴 때 우리는 극도의 슬픔에 빠져 스스로를 잘 주체하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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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의 청솔 아우름 통합논술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