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논란 부른 권고-박수 받은 권고

  • 입력 2009년 9월 7일 02시 59분


○ 초등생 일기장 못보게
○ 외국인환자 유치 반대
○ 육사 ‘3禁 제도’ 완화

국가인권위원회가 그동안 내린 권고나 의견표명 중에는 그 타당성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인권위는 2005년 3월 “선생님이 초등학생의 일기장을 검사·평가하는 것은 아이들의 사생활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며 시정을 권고하는 의견을 표명했다. 당시 해당 학교는 인권위의 권고를 받아들였지만 인권위의 조치를 놓고 “일기 검사를 통한 아이들의 글쓰기 능력향상이라는 교육적 효과를 도외시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2005년 여학생은 생리일에 학교를 결석해도 출석으로 간주하는 ‘생리 공결(公缺)제’를 교육인적자원부에 권고해 제도가 도입됐지만 현재는 유명무실하다.

2008년 5월에는 육군사관학교의 ‘3금(금주, 금연, 금혼) 제도’가 생도들의 행복권을 침해한다는 의견을 냈지만 “특수한 목적을 가진 사관학교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의견”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육사의 3금 제도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인권이라는 잣대를 무리하게 고집한 사례도 있다. 2008년 11월 인권위는 국내 의료기관에 외국인 환자의 소개, 유인, 알선 등의 행위를 허용하는 보건복지가족부의 의료법 일부개정안이 “국내 사회적 취약계층의 의료서비스 접근성을 떨어뜨려 차별 가능성이 있다”며 개정 반대의견을 냈다. 복지부 관계자는 “다른 나라는 의료산업 육성 차원에서 앞다퉈 시행에 나선 제도인데 인권위가 의료산업의 공공성이 약해지는 것을 막는다는 관점에서 접근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인권위 권고에도 개정안은 5월 국회에서 통과됐다.

올해 6월 인권위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중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시위용품의 제조·운반을 규제하는 조항과 신원을 감추려고 복면 등을 착용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규정 등이 집회 시위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할 우려가 있다며 국회의장 등에게 삭제를 권고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서울대 성낙인 교수(법학)는 “인권위가 기존의 법질서로도 구제하거나 다룰 수 있는 영역들에까지 개입해 의견을 표명하다 보니 기존의 법체계가 무시되고 인권위 조직의 존재 이유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정열 기자 passion@donga.com

○ 이력서에 ‘출신’ 안쓰게
○ 인종차별적 ‘살색’ 퇴출
○ 휠체어 막는 말뚝 제거

국민의 인권 보호와 인권 수준 향상을 목적으로 출범한 인권위는 그동안 성별 종교 인종 학력 신분 등에 따른 차별과 인권 침해를 조사해 시정 및 개선 권고를 내렸다. 일부는 편향성이나 현실성 등에서 논란을 빚기도 했지만 입사 시 학력 및 연령 제한 철폐를 이끌어내는 등 ‘인권 보호’의 측면에서 사회적 경종을 울린 권고도 적지 않다.

사회 전반에 관행으로 굳어졌던 차별 요소들을 지적해 개선한 것은 큰 성과로 꼽힌다. 인권위는 2003년 기업들이 직원을 채용하면서 입사지원서에 출신 지역, 가족의 학력 및 직위, 재산, 종교 등을 쓰게 하는 관행을 개선하라고 권고했고, 상당수 기업이 전부 혹은 일부 항목을 삭제했다. 또 경찰·소방·교정직 등 공무원을 채용하면서 키와 몸무게에 불합리한 제한을 뒀던 것도 제동을 걸어 없앴다. 군인의 의료접근권 보장 권고 등도 인권위의 성과로 꼽힌다.

학생의 머리를 강제로 삭발하지 못하게 한 결정으로 학생 인권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살색’이 인종차별적이고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결정해 지금은 ‘살구색’으로 바뀌었다. 구치소 내 여성 재소자 상대 성추행 사건이나 수사 과정에서의 가혹행위, 정신병원 내 과도한 신체구금 등 인권 침해 행위도 여러 건 밝혀냈다.

인권위는 사회적 약자의 인권 신장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권위는 2005년 서울시가 추진한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장애인 등의 이동권이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실태 조사 결과 발표와 함께 서울시장에게 교통 약자의 이동권 보장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볼라드(돌말뚝) 및 산책로의 턱을 제거하고 휠체어가 원활하게 지날 수 있도록 폭을 일부 조정하는 등의 조치를 했다.

불법체류 외국인 단속 및 강제 추방 과정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에 대해 실태 조사를 통해 문제를 제기했고, ‘인분 사건’을 계기로 육군훈련소 인권 개선을 권고하기도 했다. 보험사들이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정신장애인에 대한 보험 가입 제한에도 개선을 권고했다.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정태욱 교수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인권을 침해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인권위가 존재한다”며 “권고가 이상적, 교육적 목적이 있어 현실에서 바로 실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인권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높아야 인권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