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동구 효목동 망우공원의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옆에 최근 ‘백두산 정계비’와 같은 모양의 비석이 세워졌다. 1712년(숙종 38년)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는 만주사변 직전인 1931년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비석의 탁본이 남아 있으나 정확하게 읽기 어려울 정도로 흐릿하다.
경일대 독도·간도교육센터는 4일 광복회원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백두산 정계비를 재현한 비석을 세웠다. 이날은 청나라와 일본이 간도협약을 맺은 지 꼭 100년이 된 날이다. 간도협약은 당시 일제가 남만주철도부설권을 갖는 대신 청나라의 간도 영유권을 인정한 조약이다.
백두산 정계비가 중요한 이유는 ‘간도’가 조선 영토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 백두산 정계비는 백두산 정상이 아니라 천지 남동쪽 4km, 해발 2200m 지점에 높이 77cm 크기로 세워졌는데, 이를 경계로 하면 간도는 압록강∼정계비∼토문강∼쑹화(松花) 강∼헤이룽(黑龍) 강 이남의 연해주 지역을 가리킨다. 재현 비석 설치 작업을 추진한 경일대 이범관 독도·간도교육센터장(52·부동산지적학과 교수)은 “정계비 내용과 설치 위치를 보면 당시 청나라가 백두산의 천지를 자신의 영토로 포함시키려는 계획을 알 수 있다”며 “국경을 정하는 비석이 청나라의 강압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도 명확하다”고 말했다. 82자로 된 정계비문의 제목에는 ‘조선’이라는 말은 없고 ‘大淸(대청·대국 청나라)’이라고만 되어 있다.
재현 비석에 사용된 돌은 신라 1000년 역사를 상징하는 뜻에서 경주에서 나는 것을 사용했다. 바닥돌을 포함해 전체 높이는 210cm. 비용 1200만 원은 경일대 독도·간도교육센터 운영위원이 모은 회비와 성금 등으로 충당했다. 망우공원에 정계비를 세운 것은 임진왜란 때 전국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기리는 공원인 데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조양회관(현재 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 회관으로 사용)이 있기 때문이다.
이날 제막식에는 광복회원과 독립운동가 등 수십 명의 애국지사들도 참석했다. 이인술 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장은 “망우공원에 백두산 정계비 재현 비석이 세워진 것은 영토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며 “교육장소로 잘 활용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명식 간도되찾기운동 대구지역본부장도 “비록 재현 비석이지만 이 비석이 간도를 회복하는 국민의 힘을 모으는 소중한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희망했다.
독도·간도교육센터는 다음 달 중순경 이 비석 옆에 독도 모형도 세울 예정이다. 센터장인 이 교수는 “우리가 간도를 아예 잊어버리는 것과 언젠가는 회복해야 할 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며 “개인에게 집 같은 부동산이 중요한 것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영토였던 간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