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 22일 오후 8시경. 대전 중구 선화동 충남도청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도청 정문으로 진입하려는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등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대와 경찰이 격렬하게 대치했다. 시위대가 집회에 횃불을 동원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미리 소방차를 도청 안에 대기시켰다. 하지만 소방차는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했다. 성난 시위대가 횃불을 도청 울타리에 던지자 70년이 넘은 향나무 366그루 가운데 142그루가 순식간에 타올랐다.
이날 불타버린 향나무는 충남도청이 1932년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긴 뒤 몇 년 후 심은 가이즈카 수종으로 향나무 가운데 정원수로 인기가 높다. 도청 측이 오랫동안 정성껏 관리해 와 대전에서는 명물로 통했다. 시위 다음 날 아침 도청 주변을 지나가다가 흉물스럽게 변한 향나무를 목격한 시민단체 관계자도 “이건 해도 너무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도청 울타리에 3년 만에 새로운 향나무가 들어선다. 다음 주부터 이달 말까지 향나무를 새로 심을 사람들은 시위 당시 향나무를 태운 책임이 있는 김모 씨 등 11명. 이들은 손해배상을 해야 할 처지에 몰리자 자신들이 향나무를 구입해 울타리에 심겠다고 요청했고 충남도가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앞서 충남도는 2006년 12월 경찰 채증 결과를 토대로 김 씨 등에 대해 1억4276만9000원을 물어내라는 손해배상 소송을 내 승소했다. 대전지법은 2008년 11월 1심 판결에서 “폭력시위 때 사용된 횃불을 이 집회에 참석한 시민단체의 주요 간부였던 피고들이 준비한 점 등을 감안할 때 불법시위를 미리 준비하거나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불법행위를 유도 및 교사 방조한 점이 인정된다”며 “충남도에 9771만9000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양측은 모두 불복했지만 항소심 과정에서 타협의 실마리를 찾았다. 김 씨 등이 시설물 훼손(벽돌 울타리)과 향나무 방화의 잘못을 시인하면서 “훼손된 시설물은 현금으로 배상하고 불에 탄 향나무는 직접 복구하겠다”는 의견을 재판부에 냈다.
김 씨 등은 불에 탄 향나무와 동일한 수종을 찾으려고 전국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찾지 못하자 모양이 비슷한 전북 정읍산 향나무를 옮겨심기로 했다. 이들 향나무는 기존 향나무보다 갑절이나 큰 수종이기 때문에 71그루만 심을 예정이다.
충남도 관계자는 “배상 당사자들 가운데 조경업을 하는 사람도 있어 조경 공사비와 나무 구입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향나무를 직접 식재할 경우 배상 판결액만큼의 비용은 들지 않을 걸로 본다”고 말했다.
충남도 관계자는 “새로 심은 향나무가 만족스럽다고 판단되면 김 씨 등과 민사합의서를 작성해 재판부에 제출하고 소송을 마무리할 계획”이라며 “새 향나무를 심더라도 주변과 어울리는 수형이 잡히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대전=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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