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적벌레로 진딧물 퇴치… 태양 건조로 상품성 높여
안면도 할아버지들이 부인과 다툴 때 즐겨 놓는 으름장이 있다. “계속 이러면 내년엔 고추밭이나 확 늘려버려야 쓰겄어….” 그러면 기세등등하던 할머니들도 당해낼 수 없다. 할머니들은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며 ‘협상 자세’를 취한다는 게 안면도 사람들 얘기다.
고추농사는 힘들다. 4월부터 길게는 11월까지, 농사짓는 내내 허리 펼 시간이 없을 정도다. 게다가 농가에서는 고추농사를 ‘여자들 일’로 인식하기 때문에 고추농사를 지을수록 힘들어지는 건 할머니들이다. 그 할머니들이 일구던 ‘안면도 고추밭’이 이제 명품 대접을 받게 됐다.
롯데백화점은 충남 태안군 안면도산(産) 유기농 고춧가루를 올해 추석용 ‘1등급’ 선물세트로 내놨다. 고춧가루 2kg과 건고추 600g으로 구성된 상품이 16만 원. 일반 고춧가루와 비교하면 거의 2배 가격이다. 관광지로만 알려진 안면도에서 생산된 고춧가루가 어떻게 백화점 1등급 선물세트로 등장했을까.
“돈을 떠나서 내 몸이 사니까, 그래서 친환경 하는 거지. 예전에 무작정 농약 칠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해. 이젠 누가 내 고추를 사 먹어도 떳떳하니까 농사짓는 흥도 나.”
15일 만난 안면도 친환경고추작목반 부회장 김영수 씨(52)는 안면도 고추의 ‘급부상’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안면도 고추농가들은 2005년 친환경 농법을 도입했다. 이제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산물 단계에 접어들었다.
김 씨는 비닐하우스 8개동에 고추농사를 짓는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정체불명의 하얀 통이 놓여 있었다. 농약통이 아닌가 물어보니 ‘벌레통’이란다. 김 씨는 “농약을 안 치니 진딧물이 생겨 무당벌레나 콜레마니진디벌 같은 천적을 풀어 놓는다”고 설명했다.
안면도 친환경고추작목반은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친환경 농법을 연구한다. 처음에는 농약을 안 치자 넘쳐나는 진딧물을 손으로 으깨며 고추를 키웠지만, 올해는 백화점에 납품할 1000상자 이상을 유기농으로 키울 만큼 노하우도 늘었다.
안면도가 본격적으로 고추를 재배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문용철 안면도농협 전무는 “길게 잡아도 20년”이라고 말했다. 남들처럼 농약 쳐서 기른 고추를 서울과 인천 등의 도매상에 헐값으로 넘기다 4년 전부터 친환경 농법에 매진했다.
저녁마다 안면도로 올라오는 해무(海霧)에는 고추 성장에 필요한 무기질이 풍부했고,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많은 일조량은 태양초 재배에 적격이었다. 이런 천혜의 재배 조건에 농약을 쳐서 ‘상품성’을 떨어뜨리는 건 손해라는 인식이 농민들 사이에 퍼진 것이다.
지금 안면도 농협이 취급하는 전체 고추 생산량 180t(약 30만 근) 중 20% 정도는 친환경 농법으로 짓는다. 문 전무는 “앞으로 그 비율을 50% 이상으로 끌어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날도 안면도 유기농 태양초는 따사로운 햇볕을 받아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태안=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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