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건설공사를 수주한 대형 건설사들에 대해 공사 도급명세서를 공개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이 판결이 확정되면 아파트 공사를 수주한 뒤 전문건설사에 하도급을 맡겨 차익을 챙겨온 대형 건설사들의 이윤 구조가 공개된다는 점에서 건설업계에 미치는 파장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 고(高)분양가를 둘러싸고 수요자와 건설사 간에 시비가 빈발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유사한 소송이 줄을 이을 가능성도 있다.
서울고법 행정2부(부장판사 서기석)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서울 상암지구와 장지·발산지구 등 22개 아파트 단지 주택건설 관련 도급명세서, 하도급명세서 및 원도급·하도급 대비표를 공개하라”며 서울시 산하 SH공사를 상대로 낸 정보공개거부 취소 청구 소송에서 1심과 같이 경실련 측에 승소판결을 내렸다고 22일 밝혔다. 이들 명세서가 공개되면 SH공사와 대형 건설사가 맺은 시공단가와 실제 공사를 한 하도급업체의 시공단가를 비교할 수 있게 돼 계약대로 공사비가 지출됐는지, 대형 건설사들이 하도급업체에서 폭리를 취했는지 등을 알 수 있게 된다.
재판부는 “각 명세서는 영업상 비밀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도 있다”며 “그러나 이미 해당 아파트 단지의 분양원가가 공개된 상황에서 이러한 명세서들은 아파트 분양원가가 적정하게 산출됐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자료에 불과해 대형 건설사의 정당한 이익이 침해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SH공사로부터 22개 아파트 단지 건설공사를 수주했던 두산건설, 태영건설, 성원건설, KCC, 경남기업 등 5개 대형 건설사는 재판과정에서 “원가경쟁력이 알려져 앞으로의 입찰에 어려움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 사건의 명세서는 이번 건설사업에 국한되는 일회적 사항에 불과하고 입찰가격이 절대적인 낙찰자 선정 요소라고 보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대형 건설업계는 기업 이익에 해당하는 원도급과 하도급 간의 차액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다. 대형 건설사의 한 임원은 “민간기업인 하도급업체와의 계약까지 공개하라는 것은 지나친 것 같다”며 “하도급 과정에서의 폭리는 없어야겠지만 그렇다고 기업의 ‘속’까지 내보이라는 것은 자유시장경제 이념과 배치된다”고 말했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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