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의 시작
최근 인기 아이돌 그룹 2PM의 리더 박재범이 연습생 시절이던 2005년과 2007년 미국의 소셜네트워킹사이트인 ‘마이스페이스’에 “나는 한국인이 싫어, 돌아가고 싶어” 등의 글을 적어 논란에 휩싸였다. 결국 그는 그룹에서 탈퇴하고 한국을 떠났다. 이와 관련해 글을 제대로 번역하지 않았다는 논란부터 배타적 민족주의 문제까지 논란은 일파만파 확산됐다. 문제의 본질은 아닐지라도 우리 안의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동질감은 이번 사건의 주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동질감의 형성에는 사회, 경제, 역사, 문화 등 사회의 제요소들의 복합적인 결합이 있다는 점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문학도 그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 과거의 ‘충’의 의미
「이 몸이 죽어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고등학교 문학, 정몽주 ‘단심가’]」
‘단심가(丹心歌)’라는 이름과 함께 신하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노래로 기억되는 작품이다. 고전작품 중 ‘충신연군’의 내용을 담는 작품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즉, 이는 개인적인 가치가 아닌 당시 지배적 가치관이었다.
○ 현대의 왜곡된 ‘충’
충(忠)은 사전적으로 ‘정성(精誠)·성의(誠意)’, 또는 ‘정성과 성의를 다한다’는 것을 뜻한다. 왕조 시대의 충은 군신(君臣) 사이에서 신하된 자의 도리를 의미한다. 과거 왕조 사회에서는 임금이 충의 대상이었지만 현대에는 그 대상은 사라지고 없다. 봉건적 주종 관계에서 형성된 도덕인 ‘충’을 전용한 ‘충군’의 도덕은 근대적인 도덕의 의미로서 애국정신과는 다른 것이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전근대적 ‘충’과 근대적 국가주의 혹은 애국주의의 연결이다. 이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또한 가져오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 권력이나 거대 조직에 의해 개인에게 가해지는 폭력뿐만 아니라, 왜곡된 ‘충’이라는 가치를 내재한 일부에 의해 이뤄지는 폭력 또한 심각하다. 현대 사회의 애국주의는 상업적 이해관계와 복잡하게 얽혀 이익 창출의 수단이 되는 경우도 있다.
○ 과거 문학 속의 ‘충’의 의미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왜적들의 흉악한 꾀에 빠져 만고에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안고 있어, 백분의 일이라도 못 씻어 버렸거든, 이 몸이 변변하지 못하지만 신하가 되어 있다가, 신하와 임금의 신분이 서로 달라, 못 모시고 늙은들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향한 충성스러운 마음이야 어느 때라고 잊을 수 있겠는가? [박인로, ‘선상탄(船上嘆)’ 중(현대어 번역)]」
선조 때의 무신 박인로가 통주사(무관 벼슬)로 부임하여 전선(戰船)에서 전쟁의 비애와 평화를 추구하는 심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임진왜란과 같은 공동체의 위기를 맞아 헌신하는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가? 단지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왕’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충성의 모습이면 안 될 것이다. 당대의 역사적 한계 속에서 ‘충’의 대상이 ‘왕’이라는 존재로 구체화되었을 뿐, 그 본질은 ‘조선’이라는 공동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현대의 진정한 ‘충’은
과거는 군주제 국가였다. 당시 임금에 대한 충성은 당연했다. 오늘날의 국가는 어떤 체제인가? 민주주의다. 충의 대상은 왕에서 국가로 변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주인인 국민으로 바뀌었다. 곧 우리 자신인 것이다. 애국심 자체로는 선도 악도 될 수 없다. 애국심은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실현되느냐가 중요하다.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분명 ‘악’이고, 애국주의가 각 구성원들의 연대의 토대가 된다면 이는 ‘선’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국가라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구성원 개인의 인간다운 삶과 모두의 발전을 위한 것이다. 스스로를 그 공동체 안에 가두기 위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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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청솔 아우름 통합논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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