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이 조세형을 알아? 난 대도(大盜) 조세형보다 더 아파트를 잘 털어.”
지난해 9월 서울 중구 장충동의 한 도박장. 돈이 궁했던 무직자 정모 씨(26)와 소모 씨(26)는 순간 귀가 솔깃해졌다. 도박장에서 알게 된 김모 씨(40·특수강도 등 전과 14범)는 “부자들이 사는 아파트는 내 금고나 마찬가지”라고 호언장담하며 자신의 절도단에 동참하길 권했다.
정 씨 등은 김 씨의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한 달 뒤 김 씨를 따라 서울 강남 일대 고급 아파트를 둘러본 후 입이 딱 벌어졌다. 담배 한 번 피우는 사이 김 씨는 아파트 옆 가스배관을 타고 12층까지 올라갔다. 김 씨는 심지어 옥상에서 로프를 타고 마치 ‘스파이더맨’처럼 거꾸로 내려와 아파트의 빈집에 잠입하기도 했다. 김 씨 일당은 모두 전과자로 청송감호소를 나온 후 몰려다니며 도박에 빠져 있었다. 범행 시에는 각각 물색조, 운반조, 침입조, 장물처분조 등으로 역할을 분담해 ‘프로’처럼 일했다. 이들은 부유층 인사들이 많이 살지만 건설한 지 오래돼 폐쇄회로(CC)TV 등 방범시설이 없는 아파트나 빌라를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절도행각을 일삼던 이들은 경찰에 꼬리를 잡혔다. 28일 서울 서초경찰서는 서울 경기지역 고급 아파트에 침입해 거액의 금품을 털어온 10명의 전문절도범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지난해 10월 18일 서울 광진구 광장동 W아파트의 옥상에 설치된 케이블을 이용해 베란다 창문을 뜯고 한 집에 침입한 후 금고를 부수고 다이아몬드 반지 등 9000만 원어치의 금품을 훔치는 등 지난해 9월부터 올해 4월까지 52회에 걸쳐 총 32억7000만 원의 금품을 절취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범행에 ‘완벽’을 기했다. 일단 물색조가 사전조사를 통해 서초구 잠원동과 방배동, 강남구 압구정동의 아파트 중 231m²(약 70평) 이상의 부유층이 거주하는 곳과 집이 비는 시간, CCTV 위치, 경비원의 이동시간 및 경로를 파악하고 범행 시기를 정했다. 침입조는 고층은 아파트 옥상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가고, 저층은 가스배관을 타고 올라가 베란다를 통해 집 안에 침입한 후 자체 제작한 대형 드라이버로 금고를 부수고 금품을 훔쳤다. 경찰 관계자는 “김 씨는 자신을 조세형과 비교했다”며 “자물쇠를 채워도 1분이면 금고를 열었다”고 밝혔다. 조세형은 1980년대 초 사회 유력인사 집에서 수억 원대의 금품을 훔치고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줘 대도로 불린 인물이다.
이들의 계속된 도적행각에는 피해자들도 한몫 했다. 경찰에 따르면 피해자 중에는 대기업 간부, 의사, 변호사, 중견기업 대표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인사가 많았다. 하지만 상당수는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거나 도난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의 절반이 도난 사실을 부인했다. 피해액 8억 원을 1억 원으로 낮춰 진술한 사례도 있었다”고 밝혔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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