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면담’ 도움받은 증언, 아동 성범죄 재판서 첫 증거 인정

  • 입력 2009년 10월 6일 02시 58분


피해자 7세였던 5년전 사건
심리면담 통해 구체적 진술
대법 성추행혐의 원심 확정

지난해 5월 A지방검찰청 영상녹화 조사실. 12세 소녀 B 양이 피해자 조사를 받으려 대검찰청 디지털포렌식센터 김미영 진술분석관 앞에 앉았다. “난 너처럼 안 좋은 일을 겪은 언니나 동생들을 만나러 다니는 사람이야. 어떤 사람은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났지. 내가 뭘 잘못한 걸까’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김 분석관이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B 양은 큰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20분쯤 흐른 뒤 B 양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김 분석관은 “지금부터 너한테 일어났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줄 수 있겠니”라고 물었다. B 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B 양은 의붓아버지 C 씨가 자신에게 저지른 일을 차근차근 기억 속에서 꺼내놓았다. 5년 전 어느 여름날 저녁 거실에서 C 씨가 자신의 옷을 강제로 벗기고 추행한 일부터 이후 1년 동안 어머니가 늦게 들어오는 날마다 수십 차례에 걸쳐 반복됐던 끔찍한 일들을.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김 분석관은 다시 구체적인 순간을 지목하며 “그때 어떤 기분이 들었지?” “아빠의 손은 그때 어디 있었지?”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B 양의 입에서 잊고 지냈던 일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의붓아버지의 입에서 풍기던 시큼한 홍어 냄새가 싫었던 기억, 갑작스러운 일을 겪고 당황해 욕실로 뛰어갔던 일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1시간 40분 동안의 조사가 끝난 뒤 김 분석관은 조사실 창문을 열며 “나쁜 기억은 마음에 담아두면 병이 돼. 언니가 나쁜 기억은 모두 갖다 버려 줄게”라며 B 양을 위로했다.

당시 C 씨는 B 양의 어머니 D 씨가 그의 범행을 뒤늦게 알고 문제 삼자 허위 고소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목격자도 증거도 없는 데다 B 양마저 너무 어릴 적 일이어서 구체적 정황을 기억하지 못하자 오리발을 내민 것. 하지만 이날 면담으로 B 양은 기억의 퍼즐을 맞춰냈고 C 씨는 결국 법정에 섰다.

재판부는 심리학자를 법정에 출석시켜 김 분석관이 실시한 ‘인지면담’ 기법과 이를 이용한 진술분석 과정에 문제가 없었는지 검증한 끝에 C 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C 씨는 올해 7월 대법원에서 유죄가 최종 확정됐다. 국내 법정에서 전문가가 인지면담 조사를 통해 작성한 조서와 진술분석 결과가 처음으로 증거로 채택된 것이다.

전성철 기자 dawn@donga.com

:인지면담:

면담 대상자의 기억 속에서 더 많은 정보를 이끌어내기 위한 조사기법. 대상자가 겪은 일을 전체적으로 이야기하게 된 다음 이를 다시 쟁점별로 바꿔 물으면 더 많은 내용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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