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단지내 명문고 설립논의 점화

  • 입력 2009년 10월 12일 17시 28분


구미공단 안 LG전자 TV 생산 라인에서 일하는 김모 부장은 요즘 금요일 오후면 거의 어김없이 컴퓨터를 켜고 서울의 아내와 고1 아들과 화상 통화를 한다. "일이 밀려서 가지 못한다. 주말에 아빠 없어도 잘 지내라"라는 것이 그가 늘 하는 말이다.

김 부장과 같은 '국내 기러기 아빠'는 최근 전국 공단에서 부쩍 늘어났다. 구미시청과 대구경북연구원이 9월 200명의 공단 임직원을 조사한 결과 22.5%가 기러기 아빠였다. 엄상섭 구미시청 총무과장은 "최근 LG전자 LCD TV 연구인력 600명이 올해 평택과 서울 본부로 옮겼다"며 "근무지 이동의 주요한 원인은 자녀 교육 문제였다"고 전했다. 초 중학교 자녀를 둔 젊은 직원들을 둘러보면 구미 공단을 회피하는 성향이 더 많이 눈에 띈다. 엄 과장은 "수도권에서 지방 공단으로 발령을 내면 수도권에 있는 경쟁 기업으로 직장을 옮기는 젊은 직원들이 많아 지방 연구인력 센터의 업무 공백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지방자치단체와 공단에 입주한 산업체는 이 같은 국내 기러기와 그 피해를 막기 위해 공단 지역에서 명문고를 세우는 논의에 불을 지피고 있다. 구미공단 울진원자력공단 인천국제공항공단 월성공단 등은 이달 초부터 지자체와 공동으로 신흥 명문고 설립을 위한 공청회를 여는 한편 지역 연구소에 명문고 설립 연구 용역을 맡기고 있다.

▽국내 기러기의 열악한 교육환경=최근 구미시청의 설문 조사 결과 '자녀 교육 문제 때문에 공단을 떠나고 싶다'고 응답한 임직원은 전체의 70.5%였다. 공단에서 일하는 산업체 임직원 3분의 2 이상이 직장과 가까운 곳에서 자녀를 맡길 만한 학교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구미시 26개 고교 가운데 공립은 21개교. 한 학생은 "대부분 공립고 교사들의 생활 근거지가 대구시이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면 학생을 돌볼 틈 없이 귀가하기 바쁘다"고 말했다. 대구경북연구원은 "구미시에 있는 공립고들은 농어촌 지역과는 달리 정부로부터 기숙사 운영비를 지원받거나 수준별 교육 과정을 열기도 어렵다"고 분석했다.

지방 사립고도 산업체 임직원의 기대 수준을 밑돌고 있다. 구미시내 A고는 매년 정부로부터 재정결함 보조금을 20억 원씩 받고 있지만 법인이 내는 돈은 600만원에 불과했다. 사립고 재정 형편이 어려우면 우수한 교사를 초빙하거나 다양한 교과 과정을 개설하기 어렵다. 한국수력원자력 직원들이 일하는 울진 원자력 공단은 '교육의 오지'로 통한다. 2009년 입시에서 울진군 안에 있는 고교 3곳의 졸업생 중 연세대에는 2명, 고려대에는 1명이 입학했다. 서울대에 들어간 졸업생은 2008학년에 1명, 2009학년에는 한 명도 없었다. 이 공단의 한 직원은 "고향 출신을 제외하면 자녀와 함께 근무하는 직원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말했다.

▽공단의 염원으로 떠오른 명문고=이번 공청회에 나온 공단들은 한 목소리로 지역 명문고를 원한다고 했다. 명문고 연구 용역을 맡은 대구경북연구원 이종웅 객원 연구원은 "명문고가 공단 근무 기피와 산업 공백을 막는 유일한 대안으로 조사됐다"고 전했다. 지역주민들과 교사들은 종전의 공립고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은 반면 공단에 근무하는 임직원들은 민사고와 같은 명문고를 새로 설립해야 한다는 견해가 많았다.

명문고 설립과 운영 기금 출연에 대한 생각은 지역 주민과 기업체 의견이 비슷했다. 기업 단독으로 사립고를 설립하기보다는 지자체 시민 기업이 공동으로 재원을 마련하고 기업과 지자체가 공동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학교 설립 모델과 운영 방안에 대해서는 지역별로 편차가 났다. 입주업체가 많은 구미공단의 경우 추첨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자율형 사립고를 선호했다. 반면 한국수력원자력 임직원이 대다수인 울진 공단의 경우 포항제철고와 같은 자립형 사립고를 선호했다. 지역학생을 우선 선발하고 나머지를 전국 단위로 모집하는 학교 모델은 지역 주민이나 산업체가 공동으로 바랐다.

구미시청 공무원들은 "학교 설립 부지를 공단에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며 "연구 용역 결과가 나오면 공단 입주업체들과 학교 설립과 운영에 대한 본격 논의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15년간 일했다는 김모씨는 "일각에서 공단내 명문고 설립에 따른 계층간 위화감 조성, 공교육 불신 등 부작용도 우려하고 있지만 국내 기러기와 산업 공동화라는 연쇄 반응을 더 이상 방치할 순 없다"고 강조했다.

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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