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청년들은 지금 연애 전성시대에 다다랏다. 혁명 전의 로서아에서 청년들이 ‘동지여! 백성 가운데로’하고 부르지드시 우리네는
‘청년아! 이성의 품막으로’하고 외오치게 되엿다. 그래서 학생이고 신사고 머슴아히고 마님이고 녀학생이고 행낭어멈이고 할 것 업시
그가 눈코 바르(바로) 백인(박힌) 자라면 모다 연애 연애하는 터이다. 과연 조선처럼 연애가 성한 곳은 다시 업스리라.”
―동아일보 1924년 10월 11일자》
남녀의 사랑은 인류의 본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연애라는 이름으로 규정되고 양식화된 것은 근대의 산물이다. 연애라는 말이 동아시아에 등장한 것은 1890년대 일본에서였다. 영어 러브(love)의 번역어였던 이 말의 등장은 그때까지 남녀의 사랑을 지칭하던 연(戀) 애(愛) 정(情) 색(色)과는 다른 개념을 주입했다. 육체적 이끌림을 뛰어넘는 ‘고상한’ 사랑이란 뉘앙스를 띠게 된 것이다.
이 말이 조선에 상륙한 것은 1912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조중환의 번안소설 ‘쌍옥루’가 최초라고 알려졌다. 당시엔 ‘자유연애’의 약어로 쓰였다. 부모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관습을 거부하고 스스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했다. ‘춘향전’에서 보다시피 근대문물이 들어오기 전 동아시아에도 자유연애는 존재했지만 이 ‘예외적’ 사례는 외부에서 ‘연애’라는 개념이 틈입하면서 급속히 일반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해외 풍문을 전하던 용어였던 ‘연애’는 1921년 2월 잡지 ‘신여성’의 주필인 김원주(훗날 일엽)의 기고문을 물꼬 삼아 동아일보 지면을 봇물처럼 적셔간다.
1922년 2월 13일에는 ‘학생제군에게 고하노라-착오된 연애관념’이라는 1면 사설이 실렸다. “선진한 사회는 여론의 제재가 유(有)하며 개성의 자각이 유하며 지식의 정도가 유함으로… 우리 사회는 아즉 그만한 훈련이 결(缺)하는도다”라며 자유연애에 따르는 책임을 상기시켰다. 당시 연애는 호환, 마마보다 더 치명적이기도 했다. 그 놀라운 치사율은 이미 1922년 6월 25일 사회면 기사에서 예고된다. 기사는 그해 6개월간 경성(서울) 관내에서 벌어진 자살사건의 첫째가는 원인이 연애에 있었다고 전한다.
이를 전후해 동아일보 지면도 이 신종열병으로 자살하거나 자살을 기도한 사람들 기사로 넘쳐났다. ‘사의 찬미’로 유명한 성악가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의 동반자살(1926년), ‘황성옛터’로 유명한 여가수 이애리수와 연희전문 재학생 배동필의 자살미수(1933년)는 그 행렬의 일부였다. ‘노남녀의 연애비극, 서로 얼써안코서 열차에 투신’이라는 1938년 12월 25일의 기사 주인공은 평양에 살던 아흔 넘은 노인과 이웃집 노파였다. 근대 조선에선 ‘목숨 걸고 연애한다’는 말이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
연애가 중매를 넘어선 시점은 1980년대 후반이다. 1990년 발간된 ‘가족과 한국사회’에는 중매결혼의 비율이 80년대 초 58.4%에서 80년대 후반 39.4%로 줄어든 반면 연애결혼은 36.3%에서 54.7%로 늘었다는 조사결과가 실렸다. 연애란 신풍속이 이 땅에 들어오고 8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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