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인 P 군(18)은 일본만화에 심취한 학생이었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 할 것 없이 고개를 책상에 파묻고 만화책을 읽었다. 모든 과목이 하위권인 데 반해 일본어 시험에서는 늘 1등급이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두 달 앞둔 9월 어느 날이었다. 본관과 별관 2층을 잇는 구름다리를 친구와 함께 건너던 P 군. “나 여기서 뛰어내려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어.” 당황한 친구는 “뛸 만한 높이가 아니다”며 말렸지만 P 군은 점프를 시도했다. 결국 오른팔과 다리에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다. 평소 만화 속 캐릭터에 자신을 투영시키며 “나는 뭐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그의 돌발행동에 학교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가진 학생들이 있다. 남과 다른 웃음코드, 대화법, 행동양식을 가진 그들이지만, 정작 본인이 특이한 줄을 모른다. 다른 학생을 괴롭히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진 않기에 대놓고 싫어할 이유는 없지만,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것도 사실. 학생들은 이들을 ‘4차원’이라고 부른다.
‘4차원 학생’, 과연 어떤 이들일까?
독특한 웃음코드, 대화법을 가진 경우가 대표적. 어느 학교에나 한두 명은 있을 법한 다소 평범한(?) 4차원이다. 평상시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경우가 많아 이들의 숨겨진 세계를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는 현장에 이들은 불현듯 나타난다. “내가 방금 화장실에서 영어선생님을 봤는데…”라면서 “으으으 하하하…!” 하고 갑자기 웃기 시작한다. 친구들의 싸늘한 반응. “근데? 그래서 뭐?”라고 물으면 숨이 넘어가게 웃다가도 아무 일 없었던 듯 자리로 돌아간다.
고2 박모 군은 “수업시간 선생님의 말씀에 꼭 다른 타이밍에 크게 웃으면서 혼자 재미있어하는 애들을 보면 이해가 잘 안된다”면서 “쑥스러워하거나 창피해하지 않는 걸 보면 자신만의 세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지나치게 사변적, 염세적인 사고를 하는 학생도 4차원으로 취급된다. 또래가 아이돌 그룹 ‘빅뱅’과 ‘소녀시대’에 열광할 때 이들은 철학자 니체가 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는다. 도시락을 먹다가 “세계 자체가 더러운 괴물이다”고 주장하거나 “미래의 위험은 어떤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걸까?”라며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친구들은 이때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을 실감한다.
고2 김모 군도 학교에서 4차원으로 통한다.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학교에 6kg 아령을 들고 와 쉬는 시간마다 혼자 근력운동을 한다. 교실 뒤 사물함은 김 군의 전용 침대. 마르고 키가 큰 김 군이 폭 40cm의 사물함에 일자로 누우면 지나가던 다른 반 학생들도 흠칫 놀란다고. 문과생인 김 군은 고1 때부터 수업시간에도 배우지 않는 ‘화학2’를 공부한 것으로 유명했다(화학2는 이과생만 선택하는 과목이다). 김 군을 크게 싫어하는 친구들은 없지만 눈에 띄는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공부 스트레스가 돌출행동으로 발현되는 학생도 있다. 한 외고의 2학년 박모 양은 독특한 필기방식으로 유명했다. 책 지문의 단어 하나하나에 샤프로 최소 5∼10회 동그라미를 친다. 이렇게 한 페이지를 읽으면 마치 물에 젖은 듯 종이가 찢어질 때가 부지기수. 지면과 닿는 손과 팔목은 늘 흑연가루로 검게 물들어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좀처럼 집중이 안 된다는 것이 박 양의 설명.
같은 학교 3학년인 한 남학생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드러눕는다. 학교 옥상, 운동장에 대(大)자로 누워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지른다. 교실의 학생들은 어디선가 괴성이 들릴 때면 “그가 또 외계의 생명체와 대화한다”며 웃고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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