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선 공부에 집중하기 힘들어요. 수시에 합격해 하루 종일 ‘뭐 하고 놀까’ 궁리하는 친구들을 보면 정시에 ‘다걸기(올인)’하는 제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지고요. 시험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쉬는 시간 대성통곡하는 친구를 보면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죠. 하지만 우는 친구를 달래주는 친구는 없어요. 인생을 결정짓는 시험이 코앞인데 한눈을 팔 순 없죠. 식당에 내려가는 시간도 아까워 점심, 저녁 도시락을 두 개씩 싸가지고 다니는 마당에….”
서울의 한 고등학교.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온 요즘 고3 교실엔 냉기류가 흐른다. 누구도 큰 소리로 떠들지 않는다. 웃음도 사라졌다. 신종플루에 대한 두려움으로 학교에 나오지 않는 학생의 수도 눈에 띄게 늘었다.
고3 최모 양은 요즘 포스트잇으로 친구들과 ‘문자 대화’를 한다. ‘문을 닫고 다니자’ ‘점심시간엔 잠을 자는 학생을 위해 떠들지 말자’처럼 꼭 필요한 말만 포스트잇에 적은 뒤 교실 앞뒷문처럼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두는 것.
“서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보니 교실에선 가급적 말을 하지 않는 편이에요. 괜히 말 한마디 잘못했다 고성이 오가는 말다툼으로 번질 수 있거든요.”(최 양)
속속 들려오는 친구들의 수시 합격 소식은 고3 교실에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같은 대학에 수시 지원을 함께 했다가 한 친구만 합격한 경우, 좋았던 친구 사이가 일순 냉각되는 일이 왕왕 발생한다.
수시 합격 소식을 듣고 오히려 비통해 하는 학생도 있다. 고3 조모 군은 “7개의 학교에 수시 지원을 하면서 딱 한 군데 하향지원했는데 그 학교에만 합격했다”면서 “수능 잘 봐서 ○○대에 꼭 가고 싶었는데 희망이 사라졌다”고 하소연했다. 조 군은 “정시를 볼 수 있는 친구들이 부럽다”면서 “재수를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고 했다.
올해 수능의 복병으로 떠오른 신종플루도 고3들의 불안을 부추긴다. 고3 권모 군은 “신종플루 때문에 수능이 한 달 정도 연기될 거라고 믿는 학생이 여전히 적지 않다”면서 “신종플루를 핑계로 일주일간 학교에 나오지 않고 집에서 족집게 과외를 받은 친구도 있다”고 귀띔했다.
고3 교실에선 수능으로 인한 불안감 때문에 ‘기이한’ 행동을 하는 수험생도 목격된다. 매일 서점에서 ‘적중’ ‘만점’ ‘특급비밀’이란 이름의 책을 구입한 뒤 풀지는 않고 책상 옆에 쌓아놓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인터넷으로 대학별 전공별 취업률을 조사한 뒤 “인문계(자연계) 시험을 보겠다”며 뒤늦게 계열을 바꾸는 학생도 있다.
교복 대신 트레이닝복을 입고 생활하는 학생도 적지 않다. 고3 김모 양은 “선생님께는 ‘편안한 옷을 입고 공부하면 집중이 더 잘된다’며 양해를 구했지만 실상은 1년 새 10kg이 넘게 살이 쪄 교복이 맞지 않기 때문”이라며 “평소 같으면 복장불량으로 교문에서 선도부에게 지적당하지만 고3은 예외”라고 했다.
김 양은 책상머리에 ‘수능 대박! 필살 다이어트!’란 문구를 적어두고 힘들 때마다 수능 후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고 했다. 자기 자신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학생들은 김 양처럼 ‘○○○, 이 점수 고대로 고대가자’ ‘☆은 이뤄진다’는 응원성 구호를 써 책상머리에 붙여 놓는다.
일찌감치 수시에 합격해 토익이나 자동차면허시험공부를 하는 ‘수시파’와 수능 준비에 한창인 ‘정시파’와 달리, ‘제3의 노선’을 걷는 학생도 있다. 이른바 ‘수포생’(수능을 포기한 학생의 줄임말)이다. 이들은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을 자거나 ‘뭘 하고 놀까’를 궁리하며 하루를 보낸다.
조 군은 “한 교실 안에 대입을 포기한 학생, 수시로 이미 대학에 합격한 학생, 시험을 앞두고 있는 학생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은 채 모여 있다”면서 “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썰렁’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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