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완이(가명·4)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빠’라는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는 아빠는 야근이 잦아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이 부지기수. 아내와 다툼이 잦았고 결국 이혼 소송에 이르렀다. 아내는 아빠의 얼굴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아이에게 “아빠는 이 세상에 없다”고 가르쳤다. 엄마 또한 경제력이 넉넉한 상황. 법원은 이런 사안에서는 대개 엄마에게 양육권과 친권(親權)을 모두 주고 곧바로 이혼 결정을 내려왔다.
하지만 서울가정법원 가사4부(부장판사 정승원)는 창완이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 아빠의 존재를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엄마와 아빠를 수차례 설득했고, 창완이 가족은 지난달 중순 경기 양평군에서 열린 ‘제1회 우리 가족 행복시작 캠프’에 참여했다. 서울가정법원의 ‘자녀문제 솔루션 모임’이 이혼 가정의 자녀를 돕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창완이는 처음에는 쭈뼛거리며 아빠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메뚜기를 함께 잡고 점토인형을 만들면서 아빠의 살결을 느끼게 됐다. 아빠도 아들과 처음으로 정을 나눴다. 캠프가 끝나고 창완이는 아빠와 헤어지기 싫다며 눈물을 터뜨렸다. 아빠 엄마도 눈시울을 붉혔다. 캠프 이후 재판부의 중재로 아빠는 양육비 지급을 전제로 한 달에 2번 창완이를 만날 수 있게 됐고 이혼 소송은 조정으로 마무리됐다.
‘남의 가정사에는 깊숙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사회 분위기 탓에 법원 역시 가정문제에 적극적인 개입을 꺼려왔다. 그러나 이혼 가정이 급증하는 등 가정의 해체 속도가 빨라지면서 법원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다. 2005년부터 가사소년 사건을 전담하는 전문법관 제도가 생기고 이용훈 대법원장이 가정법원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최근 법원은 ‘차가운 중재자’에서 ‘적극적이고 따뜻한 후견인’으로 바뀌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법원행정처는 올해 6월 이혼 후에 미성년 자녀를 편하게 만날 수 있도록 마련한 면접교섭실을 전국 법원에 확대해 설치하도록 했다. 인천지법 등은 소년보호관찰소에 임상심리 전문가를 보내 보호 소년들을 개별 상담해 가정으로 돌려보내고 있다. 안산지원 등에서는 이혼 가정의 미성년 자녀를 돕기 위한 가사상담 위원 등을 초빙했다.
한국의 법 절차에 어두워 어려움을 겪는 다문화 가정을 위한 지원도 강화되고 있다. 최근 법원에는 다양한 언어의 통역 자원봉사자가 배치됐고, 10여 개 언어로 번역된 각종 소송 절차 안내서가 비치돼 있다. 양육비 지급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담보 제공을 명령하거나 월급에서 양육비를 자동 공제하도록 한 가사소송법 개정안도 9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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