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 땅거미가 내릴 무렵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마지막 시간 종료종이 울리자 시험장 정문으로 수험생이 쏟아져 나왔다. 어머니를 발견하고 웃으며 달려오는 남학생, 기다리던 친구와 부둥켜안고 울음보를 터뜨리는 여고생까지, 희비가 교차했다. ‘똑같은’ 시험을 치르고 나온 67만여 명의 수험생들이지만 수능 날 밤 그들이 세운 계획은 천차만별이다. 미뤄온 잠을 작심하고 잔 학생도 있지만, 미친 듯이 논 학생도 있다. 곧바로 수시 논술·면접고사, 정시 지원, 예체능 실기고사로 이어지는 ‘후반전’ 준비에 돌입하기도 한다. 수능 날 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 2년 만에 심야영화를 보다
고3 이숙정 양(18·경기 성남시 분당영덕여고)은 집에 오자마자 자신의 표정을 불안한 눈길로 살피는 가족을 뒤로하고 가채점을 시작했다. EBS 홈페이지에 접속하자 수능 정답지가 떠 있었다.
“그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지난 일년 내내 되뇌었던 말을 마지막으로 중얼거리며 떨리는 마음으로 정답을 확인했다. 언어영역 듣기평가에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듣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머릿속이 새하얗던 순간이 생각났다. 역시 예상했던 점수. 어머니가 직접 만든 보쌈을 가족과 함께 먹었다. 손녀를 걱정하는 할머니에게 “(수능) 잘 본 것 같아요”라고 안심시켜드렸다.
저녁을 먹고 기운을 차릴 때쯤 친구들로부터 ‘어디서 볼까’라는 휴대전화 문자가 도착했다. 수능 결과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수능 전에 계획한 대로 친구들과 함께 ‘굿모닝 프레지던트’란 심야영화를 봤다. 심야영화를 본 건 2년 만이었다.
○ 노래하고 춤추면서도…‘아! 대학가고 싶다’
노래방, 극장, PC방을 찾아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단박에’ 날려버리는 수험생도 있었다.
이날 오후 9시경 서울 지하철 종각역 출구 앞에 수험생 2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일주일 전 한 인터넷에서 ‘수능 뒤풀이’ 모임을 약속한 카페 회원들. 모임에는 재수생이 절반 넘었다.
모임에 참석한 조모 씨(19)는 “수능 날 밤 학교나 학원 친구들을 만나면 서로의 시험성적을 자꾸만 물어보게 돼 만나기가 꺼려진다”면서 “평소 잘 알지 못했던 수험생들과 만나 오늘 하루는 시험을 싹 잊고 신나게 놀려고 한다”고 했다. 1차 모임을 마친 이들은 2차로 서울 홍익대 인근의 클럽으로 향했다.
재수생 김병주 씨(19)도 이날 오후 9시 반이 넘은 시간, 집 근처에서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만났다. 모인 5명 중 대학생은 1명뿐. 김 씨는 “두 번째 치른 시험은 더 부담스럽고 떨렸다”면서 “벼랑 끝에 살짝 발을 걸치고 있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기분”이라고 했다. 치킨과 함께 맥주를 잔뜩 마신 이들은 노래방으로 향했다. 한 명이 여성그룹 다비치의 ‘사고쳤어요’를 부르자 친구들이 모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따라 불렀다. 노래하고, 뛰고, 미친 듯이 춤을 췄다.
밤 12시가 넘자 김 씨 일행은 찜질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들이 나눈 이야기는 ‘앞으로의 대학생활’에 초점이 맞춰졌다. ‘엠티’ ‘농구동아리’ ‘미팅’ ‘바다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눈 끝에 이야기는 다시 수능 결과로 귀결됐다. 김 씨는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꼭 현실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 수시, 전공 공부, 등록금 마련…내일을 생각한 하루
대학입학이라는 최종관문을 통과하기까지 아직 몇 번의 피 말리는 순간이 남았다. 특히 수능 전 수시 2차모집에 지원한 학생이나 가채점 결과에 따라 남은 수시모집에 지원할 계획을 세운 학생은 한시가 급하다.
경기 김포시 김포외국어고 3학년 안효령 양(18)은 “지원 대학의 논술고사가 21일 실시된다”면서 “오늘 딱 하루만 푹 자고 바로 논술학원에 다닐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울 여의도고에서 시험을 치른 박모 군(18)은 시험이 끝나자마자 서울 종로의 한 대형 서점으로 향했다. 박 군은 “지긋지긋한 수험서 말고 평소 읽고 싶던 책을 마음껏 읽고 싶어서 수능 전부터 계획했다”면서 “대학에서 전공하고 싶은 물리분야 서적을 원서로 읽으면서 합격의 꿈을 꿨다”고 했다.
다소 이른 감이 있지만, 대학 등록금 걱정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본격적으로 알아보는 학생도 있었다.
전남 여수에 있는 고향집을 떠나 서울에서 1년간 재수를 했던 김모 씨(19)는 “지금 당장이라도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가고 싶지만 기대만큼 점수가 나오지 않아 뵐 면목이 없다”면서 “다행히 가채점 결과 수리영역에서 1등급이 나와서 대학에 입학하면 수학 과외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논술학원비, 대학원서접수비, 대학등록금까지 앞으로도 돈 들어갈 곳이 많은데 남들보다 1년 더 자식을 지원하며 기다려준 부모님께 또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서울 우신고 3학년 윤성호 군(18)은 “대학생인 누나가 ‘몸이 고단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피땀 어린 돈을 벌어야 돈이 소중한 걸 안다’고 했다”면서 “수능이 끝났으니 내 힘으로 돈을 벌어 읽고 싶은 책이나 옷을 사고 싶다”고 했다.
당장 ‘수능 날 밤’부터 다이어트에 돌입하는 여고생도 있었다. 서울 배화여고에서 시험을 치른 서모 양(18)은 “수능 보기 전 ‘엉덩이 힘’으로 버티기 위해 지나치게 잘 먹던 습관을 버리고 늘 입에 달고 살던 초콜릿과 쿠키도 딱 끊을 것”이라면서 “대학에 꼭 합격해서 예쁘고 지적인 여대생이 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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