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 나는 생머리에 단정하게 드러난 이마, 깨끗하게 다린 교복 스커트, 작은 웃음소리를 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주변까지 정화시킬 것 같은 좋은 향기….’
남고생의 상상 속 여고생의 모습이다. 특히 외동아들로 태어나 남자중학교를 거쳐 남자고등학교에 다니는 남학생 다수에게 여고생은 인기 여성그룹 ‘소녀시대’와 다름없다.
그렇다면 여고생에 대한 이런 환상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은 언제일까? 남고생들에게 물었다.
여고생들은 옷 44사이즈를 유지하기 위해 밥을 조금만 먹는다? 남고생이 가진 대표적인 환상이다. 하지만 ‘실제’ 여고생은 다르다. 점심시간 종이 울리기 2분 전부터 채비를 갖추고 있다가 종이 울리기 무섭게 급식실로 전력질주를 하는 결연한 모습은 여고에선 흔하다. 게다가 귀엽고 아담한 여고생이 식판 가득 밥을 퍼서 오징어볶음과 김자반에 싹싹 비벼 남김없이 먹는 모습은, 건강한 몸집의 여고생이 찻숟가락만큼 밥을 떠서 ‘야금야금’ 먹는 것만큼 ‘확 깨는’ 순간이다.
여고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고1 정모 군(16)은 학원 수업을 끝내고 돌아올 때마다 학교 앞 분식집을 보며 화들짝 놀란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나온 여고생들이 떡볶이, 순대, 김밥, 라면을 ‘며칠 굶주린 것처럼’ 먹고 있기 때문이다. 남녀공학에 다니는 정 군은 “우리 학교 여자애들은 점심시간에 사과나 빵 하나를 둘이 나눠 먹던데 진짜 여고생의 모습은 대체 무엇이냐”고 물었다.
여고생은 늘 깨끗하고 단정할 것 같다는 환상은 짧은 순간 확실히 깨진다.
고3 김모 군(18)은 지난여름에 친구의 여자친구들과 ‘번개팅(시간과 장소를 정해 갑자기 만나는 것)’을 했다. 신을 벗고 앉는 분식집에 자리를 잡았는데 어디선가 심상치 않은 발냄새가 풍겨오는 것이 아닌가. ‘범인’은 파우더로 뽀얗게 화장을 하고 나온 한 여고생이었다. 김 군은 “인형 같은 외모 안에 숨겨진 지독한 냄새를 잊을 수 없다”면서 “여고생들에게선 베이비로션이나 샴푸 향기만 나는 줄 알았다”고 했다. 교복스커트 밑단이 터져 실밥이 보이거나 스타킹 올이 풀렸는지도 모르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여고생을 보면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도 든다고. 지나치게 짧게 줄인 교복치마도 도도하고 정숙한 여고생에 대한 환상을 깬다.
홈페이지나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여고생들의 사진은 남고생에겐 가일층 충격이다. 축 늘어진 체육복을 입은 여고생이 양말까지 벗고 책상에 다리를 올린 채 쿨쿨 자는 사진, 교복치마 아래 정체를 알 수 없는 색 바랜 체육복을 입고 ‘말뚝 박기’나 ‘레슬링’을 하는 사진에서 뿜어 나오는 ‘포스(힘을 뜻하는 영어표현)’는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여고생들은 수줍게 조용조용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웬걸요? 여고와 동아리 연합모임에 갔는데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하던지….”(고3 이현우 군)
이 군은 한 여고와 마술 동아리 연합좌담회를 했을 때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처음엔 수줍은 듯 이름을 이야기하고 침묵을 지키던 그녀들이 분위기가 풀리면서 모임장소를 장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군은 “너무 큰소리로 웃거나 언성을 높여서 주위 사람들에게 창피할 정도였다”고 했다.
고2 박모 군(17)은 여고생의 말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았다. 하굣길에 한 여고 앞을 지날 때였다. 한 무리의 여고생이 팔짱을 끼고 다가왔다. 박 군을 보며 큰 소리로 “얼굴 진짜 찌질하게(‘못생겼다’는 뜻의 은어) 생겼다” “키 너무 작아, 구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박 군은 “착하고 상냥한 여고생은 그야말로 상상 속에만 있는 것 같다”면서 “그날 이후 여고생들이 무서워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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