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건설의 사내(in-house) 변호사인 정수근 국내 법무팀장(41)은 연말을 맞아 몸이 10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쁘게 보낸다. 아침부터 사업장에서 쏟아지는 고객들의 민원을 처리하느라 분양관리팀과 머리를 맞댔다. 이어 재무 담당자들과 새로운 개발사업의 금융구조를 어떻게 짤지 토의했다. 오후에는 새로 바뀌는 재건축제도에 대한 회사의 대처방안을 구상한 뒤 감사팀과 연말 내부 보안 진단 작업을 논의했다. 틈나는 대로 각종 진정서를 토대로 사내 비리를 감시하는 ‘감찰관’ 역할도 맡는다.
한국마이크로소프트 사내 변호사인 정재훈 씨(45)는 얼마 전 국내 한 수사기관으로부터 간첩사건에 연루된 인사의 e메일 내용을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정 씨는 미국 본사 등과 논의한 끝에 법률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회사를 대표해 수사에 협조했다.
1990년대만 해도 사내 변호사는 변호사업계의 본류와는 거리가 먼 소외된 집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역할과 위상이 180도 달라졌다. 이남권 서울지방변호사회 사내변호사특별위원회 위원장은 “5년 전만 해도 국내의 사내 변호사는 100여 명도 채 안 됐지만 해마다 크게 늘어 올해 6월 말 집계 결과 450여 명으로 급증했다”고 말했다.
이는 2004년 초 ‘사법시험 합격자 1000명 시대’의 첫 사법연수원 수료생(사시 43회)들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생긴 변화다. 변호사 업계의 불황이 깊어지고 기업 쪽의 수요가 커지면서 실력 있는 법조인들이 대거 몰리게 된 것. 특히 외국어에 능통한 신세대 변호사들이 속속 배출되면서 기업들도 미국 변호사 위주에서 국내 변호사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지원자가 많은 만큼 영입 조건은 낮아졌다. 2000년 대 초만 해도 대기업들은 새내기 사법연수원 수료자들을 부장급으로 모셔갔지만, 지금은 대부분 과장 직급으로 영입한다. 그 대신 봉급은 차장급으로 대우하는 게 보통이다.
법원과 검찰의 고위직 출신 ‘대어(大魚)’들이 대기업 임원으로 영입된 것도 사내 변호사의 위상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올해 초 KT에 영입된 정성복 윤리경영실장(55·부사장)은 검사 출신답게 내부 비리를 잇달아 적발하면서 조직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 출신 윤진원 SK 부사장(45)도 1년 만에 능력을 인정받아 최태원 회장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됐다. 판사 출신인 김상헌 NHN 대표(46)와 정유업계 최초 여성 임원인 강선희 SK에너지 전무(44) 등도 기업의 핵심 업무를 맡고 있다. 사내 변호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최근 서울 강남(회원 72명)과 강북(107명), 여의도(100명)에 각각 사내변호사회가 처음으로 조직됐다.
그러나 사내 변호사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일부 사내 변호사는 여전히 경영진의 탈법행위를 돕는 역할에 안주하고 있다”며 “사시 출신이라는 우월감 때문에 기업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업무 협조도 잘 안 된다”고 지적했다.
김현 서울변호사회장은 “양질의 법조인들이 사내 변호사로 대거 진출하면서 사내외 분쟁과 거래상의 마찰을 사전에 해결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며 “상장 기업에 준법지원인(법조인)을 의무적으로 두고 기업 내부의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