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생활 파탄에 책임이 있는 배우자라도 장기간 별거로 이미 혼인관계가 회복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혼인생활을 유지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상대 배우자에 대한 복수 감정 때문에 이혼을 거부한 경우에만 유책(有責) 배우자의 이혼청구를 받아들여 온 기존 판례보다 예외 인정 범위를 넓힌 것이다.
이모 씨(43·여)는 김모 씨(47)와 1990년 결혼해 두 자녀를 두었다. 이 씨는 남편 김 씨의 잦은 음주와 외박으로 불화가 심해져 1997년 11월 집을 나와 친정 부모의 도움으로 미성년인 자녀를 키우며 별거해 왔다. 이 씨는 2007년 다른 남자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이듬해 2월 장애가 있는 딸을 낳았다. 이 씨는 딸을 가족관계등록부에 올리지 못해 치료와 양육에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김 씨를 상대로 이혼청구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이 씨가 이혼에 책임이 있는 배우자이고, 김 씨가 오기나 보복적 감정으로 이혼에 응하지 않았다고 볼 예외적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며 이 씨의 이혼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혼인관계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탄에 이르렀으므로 이혼사유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고, 여러 사정을 감안할 때 이 씨의 청구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 씨의 손을 들어줬다. 또 김 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자녀의 양육권을 김 씨에게 넘기고 매달 40만 원씩의 양육비를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상고심을 맡은 대법원 3부(주심 신영철 대법관)도 “두 사람의 혼인은 혼인의 본질에 상응하는 부부의 공동생활 관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되고, 혼인상태의 계속을 강제하는 것이 한쪽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이라며 이 씨의 이혼청구를 받아들인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별거 기간의 장기화로 이 씨의 책임은 상당부분 약화됐으며, 이런 상황에서 이혼 여부 판단 기준으로 파탄에 이르게 된 책임의 경중을 엄밀히 따지는 것의 법적, 사회적 의의는 감소했다”고 밝혔다. 전성철 기자 daw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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