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때부터 뼈가 자라지 않는 '연골무형성증'을 앓던 고(故) 엄동근 씨(30)는 6일 급작스런 호흡곤란으로 무산소성뇌손상이 생겨 9일 뇌사 판정을 받았다.
엄 씨의 키는 사망 당시 120㎝. 어머니 제선자 씨(51)가 엄 씨의 장기 기증을 결정해 9일 엄 씨의 간, 신장, 신장과 췌장이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등에서 환자 3명에게 이식됐다. 12일 엄 씨의 관에는 엄 씨가 13세 때부터 건강해지기를 빌며 접었다는 종이학 수천마리가 함께 담겼다.
동아일보 기자는 11일 어머니 제 씨를 서울 도봉구 창동의 제 씨 자택에서 만났다. 제 씨는 눈시울을 붉히면서도 차분하게 아들 엄 씨 이야기를 들려줬다.
스무 살이면 죽는다던 우리 큰 아들 동근이는 10년을 더 살았습니다. 1980년에 전북 임실군에서 살 때 낳았지요. 첫 아이인데다, 태어날 때부터 얼마나 예쁘고 소중했는지….
두 살부터 애가 영 힘이 없고 자꾸 눕더라고요. 세 살이 되니 손목이 뒤틀리고 걸음을 잘 걷지 못했습니다. 전국의 병원을 찾아다녔어요. 누군가 '굳을 병'이라고 하더군요. 서너 살 무렵 의사로부터 "동근이는 키가 안 클 것이다. 스무 살을 넘기기 힘들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는 까무러쳐 쓰러졌습니다.
지인들은 동근이를 안쓰러워했지만 저는 자랑스럽게 키웠습니다. 동근이가 기죽지 않게 제가 학교에서 어머니회도 하고, 명예교사로 활동도 했어요. 동근이도 그때는 조금씩 걸을 수 있었습니다. 1,2,3학년 때는 공부를 잘해 우등상을 받기도 했죠. 장난 꾸러기였죠.
동근이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유치원 때 키 그대로였습니다. '동근이가 정말 스무 살을 못 넘기겠구나' 하는 생각을 그 때 처음 했습니다. 열다섯 살 때부터는 걷지 못해 거의 기어다녔어요.
초등학교 졸업 뒤 경기도의 장애인학교에 보내려다가 행여 얼굴도 못 보고 그대로 저세상으로 보내게 될까 두려워 그냥 내 품에서 길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로 이사 온 뒤 15년 동안은 아프지 않고 잘 지냈어요. 우리 동근이는 제가 외롭지 않도록 집을 지켜주고, 텔레비전도 켜주고, 불도 켜 놓았어요. 둘이 안방은 비워 놓고 거실에서 나란히 누워 자며 "우리아들 사랑해" "엄마 사랑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살며 행복했습니다.
눈이 밤새 내리던 4일 새벽이었어요. 동근이가 방바닥에 똥을 쌌더라고요. 저녁에 "엄마, 머리가 아파 어질어질해, 잠이 안 와"라고 하더군요. 배가 고파 그런 줄 알고 물과 요구르트를 먹였죠. 5일 아침에는 카스테라 빵하고 우유, 배즙을 먹였는데 그날 밤 갑자기 동근이 몸이 축 쳐지더라고요. 숨을 못 쉬고 혀를 빼물고 손발이 시퍼래져서 인공호흡을 하고 구급차를 불렀어요. 병원에서 심폐소생술을 받고 깨어났죠. 잠시 좋아지는 듯하던 동근이는 중환자실에 입원했습니다.
집에 잠깐 갔다가 작은 아들에게 "엄마는 평소 형이 죽으면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네 의견은 어떠니?"라고 물었습니다.
동근이가 세상에 훨훨 다니게 하고 싶었어요. 좁은데서 잘 걷지도 못하고 살았던 내 아들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자유롭게 뛰어다니게 하고 싶었어요. 동근이는 몸이 아파 세상을 못 돌아다녔지만 동근이의 장기가 누군가에게 이식돼 그가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뻐요? 아들로 인해 다른 사람이 생명을 건진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저도 죽으면 장기를 기증할 거예요.
원래 동근이와 똑같은 베개를 썼는데 지금은 동근이가 없어 두개를 포개 베고 잡니다. 가슴이 아파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평소에는 동근이가 "엄마, 나 사랑스럽지?" 하면 제가 "우리 새끼!" 하고 동근이는 "나도 엄마가 좋아!"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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