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사죄 그날까지 수천 번이라도 올거야”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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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집회 900회 현장

세계에서 가장 오래가는 ‘슬픈 집회’… 혹한에도 200여명 운집
한해 한해 사라지는 ‘역사’… 피해 할머니 234명 중 88명 남아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수요집회’가 13일로 900회를 맞았다. 이날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홍진환 기자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수요집회’가 13일로 900회를 맞았다. 이날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홍진환 기자
“내가 저놈들 사과하기 전까진 죽으면 안 돼. 그때까진 안 아프고 건강하게 살 거야.”

체감온도가 영하 20도까지 떨어진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주최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촉구를 위한 900번째 수요집회 도중 강일출 할머니(82)가 결연하게 말했다.

강 할머니는 “이 집회가 900번째 열렸다고 떠들썩하지만 난 기쁠 것도 없어. 1000회, 2000회가 열리더라도 사죄하기 전까지는 수요일마다 올 거야”라고 말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아침 경기 광주시에 있는 위안부 할머니 주거시설인 ‘나눔의 집’ 근처에서 40분 정도 산책을 하는 강 할머니는 이날도 운동을 끝내고 동료 할머니 두 명과 함께 서울로 왔다.

한파가 몰아쳤지만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에 항의하는 수요집회에는 900회라는 상징성 때문인지 평소 50여 명보다 많은 200여 명이 모였다. 시민단체 등에서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강일출, 박옥선(86) 길원옥(82) 이옥선 씨(82) 등 4명의 할머니를 둘러싸고 피켓 시위에 나섰다. ‘나는 일본 정부로부터 공개 사과를 원한다’고 쓰인 문구도 보였다. 이날 집회에 참여한 박웅서 씨(27·대학생)는 “오늘 처음 왔는데 벌써 900회가 됐다고 들었다”며 “일본 정부의 아무런 반응 없이 이 집회가 900회까지 계속된 것 자체가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집회 횟수가 늘어나면서 가장 큰 걱정은 역시 ‘살아있는 역사’인 할머니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세상을 떠나고 있는 점이다. 김동희 정대협 사무국장은 “한국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 234명 중 이제 88명만 살아 계신다”며 “그나마 지난해에는 돌아가신 분이 근래 들어 가장 적은 5명에 불과해 다행”이라고 말했다.

요즘에는 워낙 날씨가 추워 할머니들의 집회 참석도 여의치 않다. 할머니 9명이 함께 살고 있는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은 “동절기라 의사 소견에 따라 수요 집회 참석을 대체로 막고 있다”며 “이제는 젊은이들이 대신 집회에 나서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이날 참석한 박옥선 할머니는 작은 체구에 분홍색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도 할머니는 구호를 외칠 때 누구보다 높이 손을 들었고, 자원봉사자들이 “사랑해요”라고 외치자 웃으며 박수를 치기도 했다. 박 할머니는 18세 때 친구가 “중국 바느질 공장에 같이 가자”고 제안해 따라갔다가 군위안부가 됐다. 광복되고 나서도 차마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2000년에야 국적을 회복하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 후로 매주 수요일마다 여기 나와. 이제 다른 건 필요 없으니 사과만 받아낼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어.” 박 할머니는 오히려 함께 집회에 나선 사람들을 걱정했다. “900회 한다고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들 와서 도와주니 고맙지만 추운데 나와서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

1시간 동안 계속된 집회가 끝나갈 무렵 참석자들은 ‘희망은 있다’는 노래를 불렀다. ‘밤새 헤맬지라도 숲 사이로 아침은 온다’는 가사를 부르며 할머니들은 두 손을 꼭 쥐고 있었다. 하지만 900회 수요집회가 끝날 때까지 일본대사관의 문은 이날도 끝내 열리지 않았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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