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의 겨울방학이 중반을 지나면서 방학숙제를 한번쯤 점검할 시기가 왔다. 이때부터 남학생 자녀를 둔 가정에선 “일기는 썼느냐, 책은 얼마나 읽었느냐”는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된다. 숙제나 평가에 무관심하고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잘 챙기지 못하는 남학생들은 “왜 숙제를 꼭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울상이다. 반면 매사에 꼼꼼한 여학생들은 성실하게 숙제하면서 공부도 하고 칭찬을 받는다. 겨울방학숙제에 대처하는 남학생과 여학생의 행동과 심리를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케이블TV 프로그램 ‘남녀탐구생활’의 형식을 빌려 분석했다. 남학생이 방학숙제 안 하는 이유는 뭘까. 알아서 잘하는 여학생은 방학숙제를 어떻게 즐길까. 남녀 ‘초딩’ 탐구생활, 겨울방학 숙제편을 보자.》
[남학생] 안 하는 거 아니에요. 왜 해야 하는지 모를 뿐이에요 이불 속에서 동면하는 곰 연기를 연마해요. 엄마의 휴대전화가 울려요. 모임이 있는 걸 깜박했대요. 앗싸. 엄마가 나가면 메이플 스토리(온라인게임)를 눈알이 빠지도록 할 수 있어요. 엄마의 전화통화를 들어요. 이럴 때 내 귀는 소머즈(청력이 발달한 미국 드라마 속 슈퍼우먼)의 귀를 능가해요. 하필 이때 1학년인 여동생이 카라(아이돌 그룹)의 미스터(히트 곡)를 크게 틀어놓고 엉덩이춤을 춰요. 공중 부양해 이단옆차기를 달리는 신공을 선보여요. 음악이 꺼졌어요. 들려요. 인사동, 밥집, 네일 아트…. 견적이 나와요. 4시간은 거뜬해요.
엄마가 소리를 질러요. 일기장 가져오래요. “변장하고 나가기 바쁠 텐데 왜 이래?”라는 말이 나오기 직전에 겨우 참았어요. 방학이 정확히 22일 11시간 지났는데 숙제 이야기를 처음 꺼내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어요.
머리를 굴려요. 책상 위를 재빠르게 훑어요. 일기장이 안 보여요. “엄마, 일기장을 잃어버렸어”라고 말해요. 엄마가 구석에 처박힌 학교가방에서 헬로 키티가 그려진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나의 일기장을 꺼내요. 아뿔싸. 엄마의 신공에 무릎을 꿇어요. 엄마가 “모임 갔다 올 때까지 일기 다 써놔”라고 말해요. 슬퍼요. 이럴 수는 없는 거예요. 엄마가 나간 후 비장의 카드를 꺼내요. 동생에게 일기장 가져오라고 해요. 베낄 생각 없어요. 그냥 단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할 뿐이에요.
가만 보면 엄마도 숙제에 관심이 줄었어요. 여름방학 때만해도 (내 숙제인) ‘어느 용액이 가장 빨리 식나요. 알아 맞혀보세요’ 실험을 나 대신 자기 주도적으로 한 엄마인 걸요. 커피, 녹차, 생수, 우유로 실험하고 사진도 100장 찍었어요. 백과사전 찾아가며 보고서도 썼어요. 엄마의 이런 적극적인 모습은 마트에서 생닭이 한 마리에 1800원일 때나 볼 수 있어요. 엄마가 방학 후 22일, 개학 전 21일인 오늘 “일기장 가져와”라고 말한 건, 이번엔 상도 없고 잘 보일 선생님과도 이젠 안녕이기 때문인가 봐요. 시키는 엄마가 없으니 저도 따라 숙제와 안녕이에요.
갑자기 효도르(이종격투기 선수) 같은 엄마 얼굴 떠올라요. 일기장을 펼쳐요. 방학숙제가 떠올라요. 매일 하는 숙제만 네 가지에요. 월수금은 영어, 화목은 수학과 컴퓨터학원에 다녀요. 학원 숙제가 너무 많아요. 하루에 단어시험을 150개씩 봐요. ‘constellation(별자리)’이라는 단어를 외워요.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가요. 아직도 엉덩이춤을 추는 동생이 부러워요. 동생의 방학숙제는 ‘나의 몸 깨끗이 씻기’에요. 오 마이 갓. 이럴 수는 없는 거예요.
[여학생] 억지로 하는 거 아니에요. 즐겁게 하다 보면 방학숙제가 다 돼있어요 수요일이에요. 아파트 분리수거하는 날이에요. 다섯 살인 동생 손을 잡고 엄마를 따라 나가요. 놀이터 가장자리를 따라 달려요.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땀이 나요. 기분이 참으로 날아갈 것처럼 상쾌해요. 집으로 돌아와 ‘지우의 겨울방학 운동 계획표’ 1월 13일 칸에 동그라미를 쳐요. 겨울방학 숙제라고 의무적으로 하는 거 절대 아니에요. 엄마도 돕고 동생도 돌보고 운동하고 방학숙제까지 한방에 끝내요. 올레!
목욕을 하고 트렌톤 리 스튜어트의 ‘베네딕트 비밀클럽’이란 책을 펴요. 영재학교에서 벌어지는 판타지 스펙터클 어드벤처 이야기예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빙의해 이야기 속을 헤엄쳐요. 책 두께가 5cm밖에 안 돼요. 고작 708쪽이라니.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라면 7800쪽이라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방학숙제로 낼 ‘나만의 책’을 만들어요. 얼마 전 ‘반기문 총장님처럼 되고 싶어요’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었어요. 줄거리와 느낀 점, 감동적인 부분을 5∼10장으로 정리해요. 손 글씨로 해야 해요. 책은 소중하니까요. 표지는 박스를 재활용해요. 책 만들고 지구 환경도 지키고, 눈감고 274711 곱하기 99231 문제를 푸는 것만큼 쉬워요. 펀치로 뚫어서 끈으로 묶을까 하다가 책 모양이 못생겨질까 봐 하나하나 풀로 붙여요. 나만의 책 만들기, 참 쉬워요.
방학 때 한 활동은 언젠가 저에게 반드시 돌아와요. 열심히 책을 읽으면 학기 중에 대회에서 꼭 상을 타요. 방학 때 즐겨하는 과학실험도 마찬가지예요. 4학년 겨울방학 때 리트머스 종이로 산성과 염기성을 구분하는 실험을 했어요. 그 내용, 5학년 과학교과서에 그대로 나왔어요. 감동의 눈물 흘렸어요. 즐겁게 방학숙제하고 공부에도 도움이 되니 얼마나 좋아요. 이거 왜 다른 애들은 모를까요.
※모든 남학생과 여학생이 위처럼 일도양단 되지는 않음을 밝힙니다. 이 기사에는 서울 S초교 5학년 박모 군과 경기 솔개초교 5학년 김지우 양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