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천안시 백석문화대 중국어학부 박설호 교수(49)는 한국과 중국에서 두루 통하는 명사다. 중국에서 태어난 교포 3세인 그는 지린(吉林) 성 연변(延邊)대 교수로 재직하던 1992년 중국정부의 국비유학생으로 한국에 왔다. 한중 수교 이후 중국정부 국비유학생 1호다.
중국정부가 그에게 부여한 미션은 한중 두 나라의 친선교류 여건을 마련하라는 것. 하지만 학생 신분에 한국어도 어눌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한국어를 ‘죽도록’ 공부하는 것뿐이었다. 호서대 경영학과 석사과정을 밟는 동안 언어소통에서 오는 압박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교수들의 강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대학원생들과도 소통이 되지 않았다. 그때마다 “독립군이었던 할아버지 고국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하던 부모와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백석문화대 중국어학부 박설호 교수는 “기업이 상품을 애프터서비스 하듯 대학도 졸업생을 애프터서비스 해야 한다”고 말했다. 천안=이기진 기자
이해하지 못한 강의는 수업 후 교수들에게 다시 물었고 대학원 동료들에게도 지겹도록 매달렸다. 도저히 정복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한국어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뒤늦게 한국에 온 아내와 함께 호서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친 박 교수는 2002년 백석문화대 중국어학과 전임교수로 임용되면서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전임교수로 임용되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는 2년제 대학의 특성을 감안해 학생들이 단기간에 중국어를 마스터하도록 도와주는 게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하고 100% 중국어 강의와 일대일 회화방식을 도입했다.
2005년에는 해외 주문식 교육사업을 도입해 학생들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중국 현지 호텔과 기업에서 인턴십을 하도록 했다.
“힘들지만 몸으로 부대끼며 생활하면 중국어에 쉽게 익숙해지지요.”
박 교수는 때로는 제자 단 한 명의 인턴십을 위해 중국에 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명절과 휴일을 반납하기 일쑤였다. 자신의 월급이 고스란히 경비로 나가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이 제대로 적응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추장을 싸들고 중국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때마다 학생들은 그를 ‘교수님’ 대신 ‘아빠’ ‘형님’ ‘오빠’라고 부르며 반겼다.
박 교수의 노력이 성과를 거두자 대학에서는 중국과 관련된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긴다. 중국 현지 호텔과 기업 등도 박 교수의 추천을 받은 학생은 간단한 면접만으로 곧바로 채용한다.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이다. “중국어를 정복하지 못하면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중국을 이기지 못합니다. 중국을 이기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의 다짐에선 중국에 대한 자부심과 한국에 대한 애정이 동시에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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