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선 판사들 실효성에 회의적
“무능력하게 보일까 재판 안 넘겨
사건배당 명확한 기준 마련해야”
법원행정처가 최근 시국사건의 잇단 무죄 판결로 촉발된 사법 갈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중대 사건을 형사단독 판사 3명으로 구성된 재정(裁定)합의부에 넘겨 재판하는 ‘재정합의제’를 활성화하겠다고 나섰지만 일선 판사들은 실효성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박일환 법원행정처장이 25일 서울고법 관내 일선 법원장들과의 회의에서 재정합의제를 활성화하고 현재 법원 예규로 규정된 재정합의제를 대법원 규칙으로 격상해 규정하기로 한 것은 사건 배당권자인 법원장들에게 이를 적극 활용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재정합의제는 다른 법관인사 개혁방안들과는 달리 현존하는 제도인 만큼 곧바로 활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최근 불거진 사법 갈등의 돌파구로 여겨지고 있다.
1심 법원에서 사건이 배당되는 원칙은 ‘법정형량 1년’에 따라 갈린다. 법정 형량이 1년 미만인 비교적 경미한 사건은 판사 1명이 재판하는 형사단독 재판부로, 1년 이상인 사건은 부장판사 1명과 배석판사 2명으로 구성된 합의부로 배당된다. 법원 예규에 따르면 △선례가 없거나 선례가 엇갈리는 사건 △사실관계나 쟁점이 복잡한 사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중대한 사건 등은 사건 배당권자인 법원장과 수석부장판사의 판단에 따라 재정합의부로 사건을 넘기도록 돼 있다. 또 사건이 일단 배당된 뒤 형사단독 판사가 스스로 판단해 해당 사건을 재정합의부로 재배당해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재정합의부가 구성된 사례는 거의 없다. 법원장들로선 단독사건을 합의부에 배당했다가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재정합의제를 활용하지 않는 실정이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민감한 시국사건의 경우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중대한 사건’에 해당하겠지만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중대하다는 판단 자체가 시빗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신영철 대법관의 서울중앙지법원장 재직 당시 재판 개입 논란이 벌어진 뒤로는 사건 배당에 대한 논란 자체를 피하기 위해 아예 사건을 컴퓨터로 자동 배당하고 있다. 또 사건이 급증하면서 모든 재판부가 사건 처리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형사단독 판사들도 선뜻 자신의 사건을 재정합의부로 넘기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실정이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형사단독 판사는 “내 사건을 재정합의부로 넘기는 게 능력 부족을 시인하거나 책임감이 없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사건을 짊어지고 가는 실정”이라며 “재정합의부로 넘길 수 있는 기준을 세부적이고 명확히 하는 방향으로 재판 예규를 고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수도권의 한 고위 법관도 “신영철 대법관 사건 이후 요즘 법원장이 하는 일이라고는 청사 관리가 대부분이란 우스갯소리가 나오고 있다”며 “법원장이 판사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중대 사건을 과감하게 재정합의부로 넘기는 용기를 갖지 않고는 분위기 쇄신이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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