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는 경찰간부지만… 능력 인정받아 고속 승진 아이 업고 회식가기 일쑤… 조는 아이 볼때마다 마음아파
살인, 폭력, 강간…. 대화 중에 이런 단어들이 튀어나오기 일쑤다. 범죄와 싸우는 경찰의 회식 자리니 그럴 법도 하다. 이런 자리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가야 하는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 서울지방경찰청 여경기동대(제9기동대) 대대장 김상희 씨(38)가 이런 엄마였다.
김 씨는 경찰대 12기 출신으로 1996년 임관했다. 경정으로 승진해 3월 경기지방경찰청 산하 일선 경찰서의 과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과장이면 일선 경찰서에서 서장 다음으로 높은 자리다. 120명의 경찰대 동기 가운데 경정은 남녀 통틀어 12명이고, 김 씨가 그중 한 명이다. 김 씨는 경찰 내부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고속 승진자인 셈이다. 그러나 엄마로서는 낙제점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는 말한다. “여경에게 아이들은 항상 미안해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김 씨는 2000년 경찰대 선배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2년 후 첫째 정윤이(8·여)를 낳았다. 오후 7시가 되면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 ‘칼 퇴근’을 했다. 눈치가 보였지만 아이를 어두운 복도에 홀로 있게 놔둘 수는 없었다.
엄마로서는 늘 낙제점 “절대 아무데도 가면 안돼” 돌아와보니 아이 사라져 경찰서 온통 뒤진 심정은…
초보엄마로 3년을 보냈다. 그럭저럭 업무와 아이 키우기를 병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2005년 서울 구로경찰서 생활안전계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악몽의 회식’이 시작됐다. 계장이 된 이상 회식에 빠질 수는 없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찾아 둘러업고 식당으로 향했다.
“어른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는 나이라는 게 다행이었어요. 그러나 밤늦게까지 술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정말 아팠어요. 엄마로서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퇴근한 후 식사 준비와 밀린 빨래, 설거지를 하다 보면 아이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아이는 늘 혼자였다. 둘째 성현이(5)를 낳은 것도 동생이 있으면 큰아이가 덜 외로울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막상 둘째 아이가 생기자 김 씨가 신경 써야 할 일이 더 늘었다. 충북 제천에 있는 시어머니가 둘째를 맡아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2005년 8월 을지연습 때였다. 을지연습은 적의 침략을 가상해 전국 주요 도시에서 민방공훈련을 하는 전시전환체제 연습이다. 모든 경찰은 어린이집이 문을 열기 전인 오전 6시까지 출근해야 한다. 고민 끝에 김 씨는 아이를 업고 출근했다. 그러나 출근보고를 하는 곳까지 아이를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경찰서 입구 초소에 아이를 세웠다. 김 씨는 “정윤아. 절대 아무 데도 가면 안돼. 엄마가 올 때까지 이곳에 꼼짝하지 말고 있어”라며 몇 차례 다짐을 받았다.
보고를 마치고 급히 초소로 달려갔다.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길한 상상이 떠오르려 했다. 고개를 저으며 경찰서를 이 잡듯이 뒤졌다. 다행히 아이는 외진 곳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이었죠. 엄마 휴대전화 번호를 알 나이도 아니잖아요. 경찰서 안에 어린이집만 있었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아마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여경이 꽤 있을 겁니다.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벌렁거려요.”
절실한 직장 보육시설 폭력시위 현장 출동보다 아이 맡기는게 더 힘들어 시부모님에게도 항상 죄송
2008년 촛불집회 때였다. 당시 김석기 서울경찰청장은 폭력적으로 변하는 집회에 ‘부드럽게’ 대처하기 위해 여성기동대를 발족했다. 시위가 연일 계속되는 바람에 일주일에 5일 이상은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염치불고하고 시부모에게 아이들을 맡겼다. 시부모는 농사일을 중단하고 상경해야 했다. 시부모에게 죄송한 며느리, 아이들에게 미안한 엄마가 돼 버렸다. 일부 시위대는 그런 김 대대장의 속도 모르고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무심코 내뱉었다.
“경찰을 욕하는 시위대가 많았어요. 원래 우리 일이 그러니 욕먹는 것쯤이야 감수하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네가 그러고도 시집을 갔느냐’ ‘그런 식으로 해서 아이를 키우겠느냐’며 소리를 질렀어요.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그러잖아도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꼭 그렇게 아픈 곳을 찔러야 했을까요?”
김 씨가 경찰이기 때문에 아이 키우기가 특히 어려운 것은 아니다. 김 씨도 같은 생각이었다. 업무 특성상 경찰의 육아 환경이 더 나쁠 수는 있지만 직장에 다니는 엄마라면 모두 비슷한 경험과 고민이 있을 거란 것.
경찰서에 어린이집이 있었다면 좀 나았을까. 김 씨는 술에 취해 횡포 부리는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경찰서마다 어린이집을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 청사나 시·구청 청사와 달리 경찰서에는 보육에 관한 개념이 희미한 것 같아요. 경찰청에 보육시설이 생긴 게 불과 2년 전이었답니다. 일선 경찰서에는 당연히 시설이 없죠. 어린이집을 이용하기 위해 힘든 본청 근무를 자원하는 여경이 많다는 거 아세요? 경찰서 3, 4곳을 통합해서라도 어린이집을 운영했으면 좋겠어요.”
야근 잦은 워킹맘들에겐 어린이집 있어도 무용지물 주말마다 지방 오가도 맡아줄 부모 있다면 ‘호사’
M홍보대행사의 이모 국장(31·여)은 주말마다 부산에 있는 시댁을 찾는다. 세 살 된 딸을 시부모가 맡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전 일찍 서울의 집을 나선다. 다섯 시간 가까이 고속버스를 타면 시댁에 닿는다.
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하루 반뿐이다. 일요일 오후 11시경 서울의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두고 온 아이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 ‘주말가족’이 된 지도 벌써 2년이 흘렀다. 이 국장은 “이런 상황에서 둘째를 가질 수 있겠느냐”며 “아이와 시부모 모두에게 죄송해 얼굴을 들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어쩌면 아이를 맡아줄 시댁이 시골에라도 있는 이 국장은 운이 좋은 편일 수 있다. 점점 아이를 맡길 곳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두 명의 아들을 키우고 있는 병원경영지원회사의 강모 팀장(38·여)은 친정과 시댁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강 팀장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회사에 묶여있다. 그러나 회사 안에 어린이집은 없다.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있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중국동포를 고용했는데 한 달에 120여만 원을 줘야 한다.
과거에는 친정이나 시댁 어머니가 아이를 돌봐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마저도 쉽지 않다. 큰아들과 둘째 아들의 아이 두 명을 돌보고 있는 여모 씨(61·여)는 “아이들을 다 키워놨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아이를 키워야 하냐”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내비쳤다. 여 씨는 손자를 돌보기 전까지만 해도 남편과 여행을 자주 다녔다. 여 씨는 두 아들에게 “더는 손자를 돌보지 않겠다”고 말할 작정이다.
지난해 7월 통계청이 전국 1만7000가구를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일주일 내내 맞벌이하는 부부가 40.1%인 것으로 나타났다. 40대의 경우 이 비율은 48.1%로 올랐다. 두 가구 중 한 가구가 맞벌이인 셈이다.
물론 보육시설도 꾸준히 늘고 있기는 하다. 국공립보육시설은 2005년 1473곳에서 2008년 1826곳으로 늘었고, 직장보육시설도 263곳에서 335곳으로 늘었다. 그러나 이런 시설의 대부분이 오전 8, 9시에 문을 열고 오후 6시에 문을 닫는다. 강 팀장처럼 밤늦게까지 일하는 ‘워킹맘’에게는 무용지물인 셈이다. 아이돌보미 서비스가 있지만 가족관계 증명서류를 제출한 뒤 몇 주를 기다려야 순서가 돌아온다.
이 때문에 많은 엄마가 비싼 돈을 주고 입주 도우미를 쓰고 있다. 입주 도우미가 아이를 학대하는 사례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엄마들은 “우리 집 도우미는 안 그러겠지”라고 기도할 뿐이다.
특별취재팀 ▽ 팀장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 교육복지부 우경임 기자 노지현 기자 ▽ 사회부 이진구 기자 이미지 기자 ▽ 산업부 정효진 기자 ▽ 오피니언팀 곽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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