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기업에 막대한 환차손 피해를 끼친 통화옵션 상품 ‘키코(KIKO)’를 두고 벌어진 기업과 은행 간 1차 법정 분쟁(가처분 신청)이 결국 은행 측의 승리로 기울었다. 기업들은 최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까지 증인으로 불러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려 했으나 허사로 돌아간 셈이다.
서울고법 민사40부(수석부장판사 김용헌)는 수출기업 아이에스스틸 등 7개 업체가 “키코계약의 효력을 정지해 달라”며 한국씨티은행과 외환은행을 상대로 낸 10건의 가처분 신청 항고심에서 1심과 달리 모두 은행 측의 손을 들어줬다고 4일 밝혔다. 1심에서는 기업과 은행의 책임을 절반씩 인정했지만 항고심 재판부는 “은행의 책임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재판부는 “은행이 기업에 키코 계약의 주요 내용을 설명한 데다 계약서에 자세히 적혀 있어 설명의 의무를 위반하지 않았다”며 “환율 변동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기업이 계약을 함으로써 스스로 선택한 기회비용”이라고 밝혔다.
현재 키코 분쟁으로 법원에 계류 중인 소송은 가처분 신청과 본안 소송(부당이익금 반환)을 합쳐 200여 건에 이른다. 지난해 12월 기업 측은 200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엥글 미국 뉴욕대 교수를 증인으로 내세워 키코가 불공정한 상품이란 점을 부각시켰고 이에 질세라 은행 측도 지난달 스티븐 로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슬론경영대학원 교수를 불러 반대 주장을 펼쳤다. 법원 관계자는 “이들 미국 석학의 증언은 그동안 국내 전문가들이 법정에서 한 증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며 “양측 모두 수십억 원의 법률 비용을 쓰면서 출혈경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본안 소송 중 40여 건을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1부(부장판사 임성근)는 8일 오후 2시 키코피해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대표로 있는 수산중공업이 우리은행을 상대로 낸 부당이익금 반환 소송에 대해 첫 1심 판결을 내릴 예정이다. 재판부는 이미 지난 한 해 동안 40여 명의 증인을 불러 심문했다. 키코 사건을 맡은 다른 3개 재판부와 키코 연구모임까지 만들어 연구했고, 사건을 집중심리한 뒤 결심까지 한 상황이다. 법원 관계자는 “기업과 은행이 힘을 합쳐도 국제경쟁에서 밀릴 판에 마주보는 기관차처럼 타협을 못하고 있다”며 “가처분 결정으로 법원의 판단 기준이 나온 만큼 판결로 승부를 보기보다는 서로 한발씩 양보해 일부 보상이 이뤄지는 방향으로 조정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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