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고, 벗기고, 뿌리고… ‘졸업 狂파티’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9일 03시 00분


가해자 잡고보니 선배들
“다른 학교도 다 그러는데…”
피해 학생 “장난 심했을 뿐”

4, 5년 전부터 광란 뒤풀이
선배에서 후배로 대물림
‘몸’에 대한 인식변화도 원인

‘교복 찢기, 속옷 차림으로 바닷물에 뛰어들기….’

요즘 중고교생들의 졸업식 뒤풀이 모습이다. 5일 서울 금천구의 한 중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졸업식을 마친 여학생의 교복을 찢어 벗겼고, 제주에서는 졸업식 후 여고생들이 속옷만 입고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과거에도 밀가루를 뿌리거나 계란을 던지는 등의 일명 ‘졸업빵’은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최근의 행태는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 ‘말로만 듣던 요즘 졸업식’

여중생 알몸 폭행 사건은 5일부터 주요 웹 포털사이트에 ‘말로만 듣던 요즘 졸업식’이란 제목으로 1분 20여 초짜리 동영상이 올라와 알려졌다.

본보 8일자 A14면 참조 ▶[휴지통]여중생 교복 상의 벗기고 케첩까지…

학생들의 졸업식 뒤풀이가 점점 도를 넘어서고 있다. 이들은 거리에서 남녀가 함께 옷을 벗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위쪽 사진). 속옷 차림으로 거리를 누비기도 한다. 한 포털사이트에 동영상으로 올라온 졸업식 뒤풀이 장면들이다. 네이버 블로그 캡처
학생들의 졸업식 뒤풀이가 점점 도를 넘어서고 있다. 이들은 거리에서 남녀가 함께 옷을 벗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위쪽 사진). 속옷 차림으로 거리를 누비기도 한다. 한 포털사이트에 동영상으로 올라온 졸업식 뒤풀이 장면들이다. 네이버 블로그 캡처
이 동영상에는 한 주택가 골목길에서 남녀 학생 20여 명이 이날 졸업한 여중생 A 양을 둘러싼 가운데 한 여학생이 A 양의 교복 상의를 강제로 벗겨 상반신을 노출시키고 또 다른 여학생이 머리에 케첩을 뿌리는 장면이 담겨 있다. A 양을 둘러싼 학생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환성을 질렀고, 피해 학생은 속옷만 입은 채 달아났다.

서울 금천경찰서는 8일 가해학생 2명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불러 조사했다. A 양의 선배인 가해학생들은 기자에게 “졸업하면 당연히 맞고 때리는 것으로 이는 학교의 전통”이라며 “다른 학교 학생들도 똑같이 하는데 억울하다”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5일 낮 12시 반경 이 학교 출신 선배와 인근 중학교 학생 등 수십 명은 학교 정문 앞에서 졸업한 여학생 2명의 치마를 찢고 밀가루를 뿌렸다. 경찰이 출동해 피해 여학생들을 경찰차에 태워 돌아가자 청소년들은 정문에서 50여 m 떨어진 골목에서 A 양을 상대로 ‘뒤풀이’를 계속했다. 인근에서 상점을 오래 운영했다는 강모 씨(54)는 “4, 5년 전부터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올해는 여학생의 브래지어 끈까지 끊는 등 점점 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 졸업식 뒤풀이는 해방감 표출?

졸업식 뒤풀이는 오래된 문화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학생들에게 학교가 감옥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어 졸업식날 탈출의 해방감이 암묵적인 동의하에서 거칠게 표현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근 고교를 졸업해 뒤풀이를 했다는 이승준 군(19)은 “교복 재킷 단추를 뜯거나 셔츠를 찢는 것은 해방감을 표시하는 세리머니일 뿐”이라며 “평소에 교복을 조심해서 입다가 다시는 안 입을 옷이라고 생각하고 험하게 다루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도를 넘어 성희롱 등 폭력으로 발전하는 것은 큰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인터넷에는 이 동영상 외에 ‘막 나가는 10대들’ 등의 제목으로 졸업식날 옷이 벗겨진 청소년의 사진들이 떠돌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정문에서 괴롭힘을 당한 아이들은 경찰차 안에서 매우 부끄러워하며 “선배 언니들이 너무 무섭다”고 했다. 한국아동청소년심리상담센터 이향숙 소장은 “가해 학생들은 공개적인 폭행으로 자기 힘을 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 대물림되는 폭력

폭행은 선배에게서 후배로 대물림되고 있다. 상점 주인 강 씨는 “작년에도 이 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이 학교에 와 남녀 학생 5명 정도의 옷을 벗겼다”며 “당한 학생들이 다음 해에 다시 와 폭행을 반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변화는 청소년들이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몸’에 관한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대중문화평론가 김지룡 씨는 “예전에는 노출이 부끄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은 웬만한 노출에는 청소년들도 태연해졌다”며 “TV나 뮤직비디오에서 아이돌 가수들이 거의 ‘헐벗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당사자들은 막상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다. 8일 경찰에서 피해자 조사를 받은 A 양도 “1년 넘게 친하게 지내던 언니들이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장난치고는 너무 심했던 것일 뿐”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이 장면을 촬영한 사람은 ‘동영상에는 안 보이지만 A 양도 웃고 있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한국아동청소년심리상담센터 이 소장은 “폭력적인 상황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자신을 ‘이건 장난’이라고 세뇌한다”며 “그래야 그 집단에서 계속 버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교육학과 문용린 교수는 “어른들이 청소년들의 준거가 되지 못해 아이들만의 문화가 외딴섬처럼 왜곡되고 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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