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부정부패 사설-기사로 고발
“3·15부정선거는 무효” 호외 발행
김주열군 죽음 알려 혁명 불붙여
시위 생생한 보도… 시민승리 이끌어
6·25전쟁이 끝난 지 불과 7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시민의 힘으로 부정한 권력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4·19혁명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인촌 김성수 선생이 이승만 대통령 재선 목적의 개헌과 국회의원 구속에 반대하며 독재에 맞서는 비장한 심정을 담아 15m 길이의 사퇴서를 제출하고 2대 부통령직을 내던진 것이 1952년 5월이었다. 자유당 정권은 반대파를 탄압하고 부정선거를 자행하며 정권의 수명을 연장해 나갔다. 1960년 4월 시민혁명의 열기가 타올랐고, 그 역사의 한복판에서 동아일보는 예리한 필봉으로 정권의 잘못을 비판했다. 부정선거 현장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른 김주열 군 시신 앞에서, 총탄이 빗발치는 경무대 앞에서 동아일보는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시민과 함께했다.
○ 부정선거 수법 샅샅이 파헤쳐
4·19혁명 전 동아일보는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며 비판 보도를 계속했다. 자유당 정권이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관권선거를 벌이자 그해 2월 9일자 ‘장충단 강연회장에 갔다가 몽둥이와 권총으로 구타’ 기사로 이를 보도했다. 2월 12일 오후 정·부통령후보 장택상 박기출의 선거운동원들이 폭력배에게 구타당하고 추천 서류를 강탈당하자 이를 사진으로 특종 보도하는 등 일찌감치 부정선거를 폭로했다.
4·19혁명의 서막은 2월 28일 대구에서 올랐다. 2월 28일 대구의 고교생 1000여 명이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여 경찰과 충돌해 10여 명이 부상하고 100여 명이 연행되자, 동아일보는 경찰이 학생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진 등을 보도해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켰다.
3월 3일 민주당이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 지침인 ‘선거방법지령’을 폭로하자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초당적 특별조사단의 구성을 촉구한 뒤 영호남과 충남 일대에 기자를 특파해 은밀히 진행되던 부정선거 사전 공작을 ‘3·15선거 카르테’라는 제목으로 선거 전날까지 연일 게재하기도 했다. 동아일보의 보도로 3·9인조 공개투표, 공무원마다 번호표 10장 확보운동, 협박에 의한 민주당 선거위원 사퇴, 공개투표 연습 등의 부정선거 수법들이 샅샅이 파헤쳐졌다.
○ 동아일보에 실린 김주열 군 사진 도화선
동아일보와 시민들의 노력에도 3·15부정선거가 자행되자 민주당은 ‘3·15선거는 불법, 무효’라고 선언했다.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해 이를 전했다. 동아일보는 3월 15, 16일자로 ‘사복경관이 공개투표 지휘’ ‘3인조 공개투표 끝내 감행?’ ‘터놓은 부정선거’ ‘백주 공공연한 테러’ ‘마산서 데모군중이 지서를 습격’ 등의 기사를 내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 수천 명이 들고 일어났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3·15의거가 일어나자 동아일보는 사망자 수를 줄이기 위해 혹시 암매장한 시신이 없을까 추적하면서 시위 사망자 유족 사연을 연일 보도했다.
동아일보가 추적하던 경찰의 만행은 3·15시위에 참가했다가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르자 사실로 드러났다. 동아일보는 태극기에 덮인 김주열 군의 시신 사진과 최루탄이 박힌 각도까지 표현된 김 군 머리부분 도면을 보도해 김 군의 억울한 죽음을 전국에 알렸다. 자유당 정권은 시위의 원인을 “공산분자의 배후 조종”으로 규정했다. 동아일보는 4월 14일자 사설에서 “평화적 시위마저 탄압할 것 같은 협박공갈을 국민대중에게 가했는데, 묻노니 정부는 무슨 낯으로 자유선거제도를 부활하려는 대중투쟁을 억압하겠다는 것인가”라고 썼다.
4·19혁명 당시 고려대 2학년이었던 김유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은 “동아일보는 앞장서서 부정선거를 폭로하고 시위대의 주장을 전국에 전하며 4·19혁명의 불을 댕겼다”고 회상했다.
○ 계엄하에서도 “이승만 박사가 책임지라” 직필
부정선거와 자유당 정권에 항의하는 시위는 전국에 확산됐다. 4월 19일에는 고등학생, 대학생과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시위에 나섰고, 경찰은 시위대에 발포했다. 이날 동아일보 이명동 사진기자가 총탄이 비 오듯 하는 경무대 앞 현장에서 총에 맞아 쓰러지는 학생들의 모습을 유일하게 촬영해 보도했다. 이 기자는 “시내 곳곳에 나가 있던 동아일보의 취재 차량은 여러 곳의 시위 상황을 시위대에 전하는 통신병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는 군대가 서울에 출동하고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4월 21일자 사설에서 ‘부정선거 무효화와 재선거’를 요구했다. 22일에는 4·19 희생자들을 위한 위문금품 접수를 사고로 게재하고 24일 희생학생위령탑 건립 계획을 발표했다.
자유당 정권이 미봉책으로 정국 전환을 노리며 시간을 끌자 동아일보는 4월 25일자 ‘자유당의 지연전술’ 제하의 사설에서 “우리들 국민은 10여 년의 정치가 이 박사 1인에 의한 독재정치였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이 박사는 그 자신의 책임을 자유당이나 과거 및 현재의 국무위원들에게 전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라고 준엄하게 이 대통령의 책임을 추궁하고 나섰다. 다음 날인 26일 이 대통령은 마침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성신여대 사학과 홍석률 교수는 “동아일보는 계엄령이 내린 뒤 정국의 향방이 불투명하던 때에도 보도 통제를 무릅쓰고 이승만 하야를 주장했다”며 “동아일보가 AP통신을 비롯한 외신 보도를 전하면서 4·19혁명 전후 한국의 정세가 세계에 그대로 알려지고 있다고 보도한 것도 시위대를 고무시켰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동아일보 차량 가는곳마다 시민들 박수치고 만세불러 지국엔 제보 끊이지 않아” ▼
■ 당시 본보 기자였던 이만섭 前의장
4·19혁명 당시 이만섭 전 국회의장(78·사진)은 정치부 기자였다. 1958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그는 그해 포항 영일을구 재선거를 취재하던 중 부정선거를 막으려 표를 몸으로 감싸다 깡패들에게 얻어맞고 개표방해죄로 입건되기도 했던 강단 있는 기자였다. 5·16군사정변 직후에는 ‘윤보선 대통령 민정이양 촉구’ 기사로 필화를 입어 2개월간 육군 교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60년 4월 11일 김주열 군의 시신이 경남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를 무렵 이 의장은 국회조사단과 함께 마산에 특파됐다. 현장은 이미 동아일보 사회부 이강현 기자(작고)가 취재 중이었다.
“마산은 전쟁터 같았어요. 시민과 경찰이 정면충돌해 유혈 사태로 번졌거든요. 13일 밤에는 마산 도립병원에 안치됐던 김주열 군의 시신을 경찰이 빼돌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병원으로 달렸어요. 시신을 싣고 김 군 고향인 남원으로 향하는 경찰차를 취재차량을 타고 추격하다가 경찰차들이 가로막아 결국은 놓쳤습니다.”
이 의장은 당시 ‘마산 사태 진상조사단’으로 내려온 자유당 의원들이 4월 14일 “마산 시위의 배후에는 공산당이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발표를 하면서 오히려 시민들의 분노에 불을 붙여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됐다고 말했다.
“마산으로 특파되던 날 아침에 장면 부통령을 공관으로 찾아가 만나 ‘나중에도 떳떳하게 정치를 하려면 지금 부통령직을 내던지셔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학생들의 희생으로 정권을 잡았다는 비판을 들을 수 있다’고 건의했어요. 장 부통령은 ‘국민들이 4년 임기로 뽑아주었는데 도중에 그만둘 수 없다’고 답했고….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 의장은 “동아일보 취재 차량을 타고 시위 중인 마산 시가를 지나면 시민들이 열광하며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동아일보 마산지국에는 각종 제보가 끊이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3·15 부정선거를 폭로하고 마산의 시위를 집중 보도했습니다. 김주열 군의 억울한 죽음을 전국적으로 알린 것도 동아일보였습니다. 4·19혁명은 동아일보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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