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리넷 연주가인 나사렛대 이상재 교수. 비장애인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그는 “내가 주변에 용기와 희망을 줄때 큰 삶의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나사렛대
명지휘자인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본래 첼리스트였다. 1886년 그가 속한 악단이 브라질에서 ‘아이다’를 공연할 때 지휘자가 갑작스럽게 유고되자 단원들은 그를 대타로 추천했다. 평소 지휘에 관심을 보인 데다 곡을 죄다 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대에 오른 토스카니니는 악보를 치워 버리고 멋지게 대작을 지휘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토스카니니가 악보를 외운 것은 지독한 근시 때문이었다. 그를 불편하게 했던 근시가 그를 지휘자로 만들어 준 셈이다. 시각장애인 클라리넷 연주가로 잘 알려진 충남 천안 나사렛대 이상재 교수(43·관현학과)에게 그 얘기를 들려줬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연주를 위해 악보를 외워야 해요. 그 전에 먼저 악보를 점자로 바꿔야 하죠. 편곡의 경우 공연에 임박해 악보가 나오면 밤을 꼬박 새워야 해요. 불편하긴 하지만 그 덕분에 연주 때는 훨씬 집중력을 발휘하죠.”
이 교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77년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술래잡기를 하다 교통사고로 눈을 다쳐 9번이나 대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한줄기 빛마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클라리넷 음색은 청아하면서도 따듯해요. 동네 형이나 옆집 누나 음성처럼 포근하죠.” 클래식에 심취한 부친 덕분에 어려서부터 음악을 즐겨 들었던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클라리넷 연주를 시작했다. 클라리넷은 어둠과 절망에 빠져든 그에게 위안과 희망의 빛이었다.
서울 맹학교 초중고교를 졸업한 뒤 중앙대 관현악과를 거쳐 1991년 미국 3대 음악대학 가운데 하나인 피바디 음악대에 입학했다. 장애인이라면 적극 도와주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특혜를 주지는 않는 미국 학위시스템에 적응하려고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97년 ‘20세기 프랑스 클라리넷’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각장애인이 피바디 음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기는 한국인으로는 물론 이 대학 140년 역사에서 처음이었다. 그는 학위와 함께 최고 졸업자에게 주는 ‘린 테일러(기부자 이름) 상’도 수상했다.
귀국 후 중앙대와 총신대, 나사렛대 등을 거쳐 2008년 나사렛대 전임 교수로 임용된 그는 교수로서, 또 음악가로서 지칠 줄 모르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동안 브람스 탄생 170주년 기념 음반과 크로스 오버 음반인 ‘Close Your Eyes’, ‘Painted Times’, ‘이상재의 편지’ 등 4개의 음반을 냈다. 벅스뮤직은 그의 브람스 음반을 “브람스 음악의 심오함과 내밀한 정서를 따듯하고 섬세한 음색으로 담아냈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지금까지 300여 회의 연주와 오케스트라 공연을 했다. 이 가운데 2007년 시각장애인 음악가들로 창단한 ‘하트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희망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교도소에 위문 연주를 갔을 때였어요. 재소자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조화를 이루는 우리 연주를 보고 ‘사회에 나가면 다시 한 번 잘 살아 보겠다’고 울먹이며 다짐했죠. 우리 단원들도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졌어요.”
이 교수는 “장애인으로서가 아니라 실력으로 인정받는 음악가이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의 장애가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고, 그것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부모와 학우, 그리고 사회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길이라면 결코 마다하지 않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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