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이자, 사건시점 아닌 소송일부터 계산”… ‘허 일병 사건’ 총 21억서 10억으로 줄어
6000억대 과거사 소송 영향 줄듯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수사기관의 가혹행위 등이 있었던 시국사건이나 의문사 사건 피해자들에게 지급될 손해배상금의 이자(지연손해금)를 수십 년 전의 사건 발생 시점이 아니라 최근 소송이 제기된 시점부터 계산한 첫 판결이 나왔다. 이 판결이 확정되면 과거사 사건의 배상금 규모가 크게 줄면서 청구액이 6000억 원대에 이르는 과거사 사건 소송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6부(부장판사 김흥준)는 1984년 군 복무 중 3발의 총상을 입고 숨졌으나 자살로 발표됐던 대표적인 군 의문사 사건인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을 타살로 결론내리면서 “국가는 허 일병 가족 5명에게 9억2000만 원의 위자료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또 “이 소송이 제기된 2007년 4월부터 선고일인 이달 3일까지 배상원금에 연 5%의 비율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허 일병 유족은 위자료에다 지연손해금(1억2000여만 원)을 합쳐 총 10억4000여만 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18일 재판부에 따르면 소송 제기 당시 허 일병 유족은 “다른 과거사 사건 판결처럼 배상금의 이자를 사건 발생일로부터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청구가 받아들여졌다면 사건이 일어난 1984년부터 현재까지 26년간의 이자만 11억8000여만 원에 이르고 위자료까지 합친 총 배상액은 21억 원이 된다.
하지만 국가 소송을 대리하는 서울고검은 “과거사 사건에 대한 국가 배상금이 과다해 국민의 세금 손실이 크다”며 지연손해금 산정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현재의 물가대로 위자료를 계산했다면 소송 제기 또는 판결 시점부터 지연손해금을 가산하거나, 수십 년 전 사건 발생 당시의 물가대로 위자료를 산정했다면 그때부터 지연손해금을 가산해야 한다는 것. 서울고검은 이 같은 과거사 사건의 배상금 산정 문제를 제기했던 동아일보 2009년 11월 27일자 기사를 참고자료로 재판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고심 끝에 이자 계산 시점을 26년 전이 아닌 소송을 낸 2007년부터 잡도록 허 일병 유족에게 권유했고, 유족은 이를 받아들여 청구 취지를 수정했다.
민법상 불법행위에 대한 지연손해금의 기산점은 불법행위가 일어난 때로 돼 있다. 법원은 이를 근거로 이자를 포함해 수십억 원에서 수백억 원에 이르는 배상 판결을 내려왔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서울고법은 인혁당 사건 관련자와 가족 등 67명이 낸 소송에서 사건 발생 시점인 1975년부터 5%의 이자를 가산해 모두 635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위자료 원금은 235억 원이지만 34년간의 이자 때문에 배상액이 세 배 가까이로 불어난 셈.
서울고검 관계자는 “허 일병 사건은 과거사 사건의 지연손해금 산정 기산점을 소송 제기 시점으로 본 첫 판결”이라며 “국가가 과거 불법행위에 배상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지나친 배상액은 국민의 법감정에 반하기 때문에 모든 과거사 사건에 대해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받아볼 방침”이라고 말했다. 현재까지 법원에 제기된 과거사 관련 손해배상 청구 사건은 모두 37건으로 위자료와 지연손해금을 합치면 청구액이 6000억 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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