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 장현진씨 美서 기증서약
한국인 환자에 연결돼 깜짝
“美선 면봉 하나면 절차 OK
동포가 이식받게돼 더 기뻐”
“당신과 골수유전자(조직적합성항원형)가 일치하는 사람이 백혈병으로 고통 받고 있어요. 당신의 골수(조혈모세포)를 기증받으면 완치될 수 있습니다.”
회사원 장현진 씨(40)는 지난해 6월 미국 조혈모세포은행으로부터 이 같은 내용의 e메일 한 통을 받았다. 그는 수술에 대한 두려움이 들긴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좋습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1988년 서울 대원외국어고 3학년에 다니던 장 씨는 무역업을 하던 부모를 따라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갔다. 장 씨는 노스리지 캘리포니아주립대를 졸업하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뒤 영화사에 취직했다. 1999년 이 회사의 한국지사장으로 발령 받은 후에는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현재 한 대기업 자회사의 간부로 근무하고 있는 그는 골수 기증 시술을 위해 최근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장 씨는 2006년 10월 미국에 들렀다가 골수 기증 봉사활동을 하던 지인으로부터 “미국에는 유독 한국인들의 골수 기증이 적다”는 얘기를 들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 그는 미국 조혈모세포은행에 골수기증 의사를 밝혔다. 피를 뽑아야 하는 한국보다 등록 절차도 간단했다. 면봉으로 얼굴과 혀 아래 부분의 세포만 긁어내면 바로 등록이 됐다.
장 씨는 미국에서 골수 기증 의사를 밝힌 지 3년 만에 나타난 이 환자가 당연히 미국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수술도 미국에 가서 받아야 할 거라 여기고 출국 준비도 했다. 그러나 장 씨의 골수를 기증받는 환자가 공교롭게도 한국인이라는 걸 곧 알게 됐다. 기증자와 환자의 신원을 비밀로 하는 규칙상 서로 만날 수는 없었지만 미국 기관을 통해 골수를 주고받게 된 이들이 모두 ‘한국인’인 인연을 맺은 셈이었다.
골수 안에 비정상적인 세포가 과도하게 증식해 생기는 만성골수성백혈병에 걸린 이 환자는 골수기증자를 찾지 못해 수년간 고통을 겪었다. 이 병은 유전자가 일치하는 사람의 골수를 이식받는 것이 유일한 치료법이지만 골수기증자와 환자의 유전자가 일치할 확률은 2만분의 1에 불과하다. 이 환자는 그동안 한국조혈모세포은행협회를 통해 기증자를 찾아봤지만 유전자가 맞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일본, 대만 등지까지 수소문하다 지난해 미국 조혈모세포은행으로부터 유전자가 일치하는 골수기증자가 있다는 낭보를 들었다. 물론 환자와 미국 은행 측 모두 기증자가 한국인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장 씨는 골수 채취 수술을 받기 위해 최근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실에서 만난 장 씨는 “수술을 받는다고 하면 걱정하실까봐 어머니께는 비밀로 하고 형에게만 알렸다”면서도 “한국인의 생명을 살릴 수 있게 돼 오히려 더 잘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난치병 환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나도 잘 안다”고 털어놓았다. 장 씨의 아버지도 난치병을 앓다 지난달 7일 세상을 떠난 것. 아버지를 1년 동안 괴롭힌 병은 신경세포가 서서히 파괴돼 근육을 쓸 수 없게 되는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이었다. 장 씨는 “병이 악화돼 가는 아버지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정말 고통스러웠다”며 “골수를 빨리 기증해 환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모두 덜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수술에 앞서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술까지 끊었다는 장 씨는 “부디 수술이 잘돼 환자가 새로운 삶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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