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저녁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골목. 금요일 저녁답게 곳곳에 외제 승용차가 즐비하고 탤런트 뺨치는 외모의 선남선녀가 눈에 많이 띈다. 인근 압구정동과 청담동도 비슷하다. 그 한가운데 거리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막걸리집이 있다. 이름은 ‘달빛술담(談) 문자르(Moon Jar)’. 귀퉁이가 찌그러진 노란색 주전자로 술을 따르는 손님들은 스키니진과 아찔한 킬힐(굽이 높은 구두)을 뽐내는 여자들, 컬러풀한 스니커즈 또는 윙팁(앞코에 ‘W’자 재봉선이 들어간 스타일) 구두로 멋을 낸 남자들이다.》
서울 청담-압구정-홍대앞 막걸리바 ‘유행의 거리’ 점령 ‘맛 알아맞히기’ 게임 열풍 호텔엔 막걸리존 생기고 피부미용까지 영역 넓혀
“앞으로는 유명한 막걸리 이름과 내력을 한두 개씩 외우고 맛도 음미할 줄 알아야 할 겁니다. 한때 와인 이름 하나쯤 외우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처럼 평가받던 시절이 있었는데 곧 막걸리가 그렇게 될 테니까요.” ‘문자르’의 이승택 사장(31)은 시대를 앞서가고 유행을 이끄는 사람들이 막걸리를 찾고 있다고 확신한다. 막걸리바가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서울 신사동이나 청담동, 압구정동, 홍익대 앞 등에 많이 생겨나는 이유다.
○ ‘○○포차’는 가라
요즘 막걸리집은 이름부터 다르다. 과거에는 ‘○○포차’ ‘대폿집’ 등으로 불렸지만 개성과 운치를 드러내는 이름으로 확 바뀐 것. ‘달빛술담 문자르’만 해도 ‘달빛술담’은 ‘달과 빛, 술과 담소가 있는 공간’이라는 뜻이며 ‘문자르(Moon Jar)’는 ‘달 항아리’라는 의미다. 홍익대 부근에 새로 문을 연 막걸리 카페의 이름은 강렬한 느낌을 주는 ‘더 막걸리’다. 이 외에도 홍익대 앞 ‘친친’이나 압구정동 ‘무이무이’ 등도 젊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장은 “밝힐 수는 없지만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그룹의 회장님들도 가끔 찾는다”고 말했다. 특히 젊은 사람과 소통을 강조하는 인사들이 막걸리를 소통의 도구로 삼을 때가 많다고 한다. 막걸리바를 내세우는 술집이 때로는 카페의 느낌을, 때로는 갤러리의 느낌을 주도록 인테리어를 하는 것은 세대 간 소통을 염두에 둔 것이다.
○ 백화점과 호텔에도 막걸리
유행이라면 뒤처지지 않는 백화점 문화센터에도 막걸리 관련 강의가 등장했다. 롯데백화점은 올해 봄학기에 ‘나만의 막걸리 칵테일 파티를 위한 술빚기’와 ‘막걸리 전성시대’ 등 막걸리 강좌를 처음 선보였다.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아줌마 고객’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 신세계백화점도 ‘국내 전통술에 대한 이해’ ‘가정에서 막걸리 빚는 법’ ‘나만의 막걸리 칵테일 만들기’ 등의 강좌를 개설했다.
최고급 문화의 상징인 특급호텔에서도 막걸리가 인기다. 막걸리 맛의 기본을 유지하면서도 병이나 사발을 별도로 제작해 고급스러운 느낌을 냈다.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의 이재옥 한식 조리장은 “막걸리에 대해 선입견만 버리면 막걸리와 고급문화의 조화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 호텔은 지난해 8월부터 막걸리를 팔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한식당 음료 매출의 4%를 차지했고 올해 1월에는 10%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워커힐은 올해 벚꽃으로 유명한 ‘워커힐 봄꽃 축제’ 기간에 ‘막걸리 존’을 만들어 고급 백자 술병과 잔에 담긴 막걸리를 판매할 계획이다.
○ “막걸리는 쉽고 재밌다”
막걸리의 대성공을 점치는 사람들은 막걸리가 쉽고 재미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비교해 말하면 와인은 너무 어렵고 맥주는 너무 식상하다는 것. 요즘 막걸리바에서는 여러 종류의 막걸리를 작은 사발에 따른 뒤 맛을 보고 어떤 막걸리인지 맞히는 게임이 인기다. 예를 들어 덕산막걸리인지, 이동막걸리인지, 참살이탁주인지 알아맞히는 식이다.
와인에 대해서는 구분은 고사하고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상하게 막걸리는 잘 맞힌다. 업계 사람들은 “이유는 잘 모르지만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막걸리 DNA’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와인 소믈리에이기도 한 막걸리 제조업체 ‘초가’의 안승배 연구실장은 “프랑스 사람들이 와인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이 알고 자부심이 강한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라며 “우리도 우리 안의 ‘막걸리 DNA’를 잘 활용하면 막걸리도 프랑스 와인처럼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발전 가능성 무궁무진
‘트렌드 세터’들에게 ‘딱 걸린’ 막걸리는 그 영역이 상상을 넘어서고 있다. 막걸리의 생효모, 단백질, 당질, 콜린, 비타민B₂ 등을 피부 노화방지와 미백에도 이용한다. 막걸리 양조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손이 나이보다 훨씬 곱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서울의 ‘미그린 한의원’은 동의보감에 기재된 누룩에 대한 효능과 막걸리를 활용한 민간요법을 이용해 ‘피부가 먹는 막걸리’라는 내용의 피부 미용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다.
최신 유행의 대명사인 미국 애플사의 ‘아이폰’에도 막걸리는 스며들었다. 무료 애플리케이션(응용프로그램)으로 우리나라 막걸리를 홍보하는 것. 국내의 막걸리 콘텐츠 관련 모임이 만든 이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으면 전국 11곳의 양조장과 막걸리 맛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 전화번호를 터치하면 양조장으로 전화 연결이 돼 주문도 할 수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 버전이 제공되는데 일본어와 영어 버전은 유료다. ▼막걸리 관심도 체크리스트▼ ▲최근 일주일 사이 막걸리를 마셔본 적이 있다. ▲막걸리 관련 신문 기사나 책을 정독한 적이 있다. ▲막걸리 종류를 두 가지 이상 알고 있다. ▲한 가지 이상의 막걸리 맛을 구분할 수 있다. ▲각기 다른 막걸리와 어울리는 안주를 추천할 수 있다. ▲고급 막걸리 값이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개팅을 막걸리 마시면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막걸리와 살균 탁주의 차이를 안다. ▲막걸리바(카페)에 들러본 적이 있다. ▲막걸리바를 최소 세 곳 이상 알고 있다.
7개 이상에 해당하면 막걸리에 관한 한 ‘트렌드 세터’ 4∼6개에 해당되면 막걸리에 대해 ‘편견을 극복하고 좋아하는 사람’ 2, 3개에 해당하면 막걸리를 ‘좋아하려는 사람’ 0, 1개에 해당하면 막걸리에 ‘관심이 필요한 사람’
우리 전통주에는 청주 탁주 막걸리 소주가 모두 포함된다. 이처럼 다양한 전통주를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 박시도 전주전통술박물관장은 “거르는 방법과 증류 여부에 따라 크게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통주를 빚는 과정은 크게 ‘쌀 씻기-지에밥 짓기-누룩 첨가-발효-숙성-술 거르기’의 순서로 이뤄진다. 전통주는 모두 이 과정을 공통적으로 거친다. 하지만 우선 거르는 방법이 다르다. 또 통상 15∼20일 정도 걸리는 숙성기간도 지역과 술도가별로 차이가 있다.
한산소곡주, 경주법주와 같은 청주(淸酒)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술이 맑고 투명하다. 술독에 용수(싸리나 대나무로 만든 둥글고 긴 통)를 박은 뒤 여과된 것을 받아낸 술이다. 반면 탁주(濁酒)는 용수를 쓰지 않고 체로 큰 건더기만 거른다. 간격이 촘촘한 용수를 사용하지 않아 술 색깔이 뿌옇다. 막걸리도 탁주의 일종이다. 안동소주와 전주 이강주로 대표되는 소주는 청주나 탁주와 달리 술을 거른 뒤 증류하는 과정을 거친다. 자연적인 발효 과정을 거치면 알코올 도수가 14∼15도를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막걸리가 정식으로 법에 이름을 올린 것은 언제일까. 박록담 한국전통주연구소장은 “서민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이름이 일제강점기 때 주세법이 제정되면서 처음 공식적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주세법에서 알코올 농도 6∼8%의 술을 막걸리로 분류하고 주세를 부과했다는 것이다.
<특별취재팀>
▽팀장 홍석민 산업부 차장 ▽산업부 김기용 기자 kky@donga.com 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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