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거울’ 신문 존재이유 새삼 일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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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24일 03시 00분


■ 정진석 교수가 본 ‘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

일제치하의 동아일보는 조선의 사회상이 농축된 타임캡슐이다. 일제의 수탈과 억압 속에서 고달픈 삶을 이어왔던 아픈 역사와 함께 역경을 헤치면서 미래의 웅비를 꿈꾸던 정황이 씨줄 날줄로 얽혀 있다.

‘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 시리즈는 역사에 새로운 숨길을 불어넣는 작업이었다. 일제하 동아일보는 기사 한 줄, 단어 하나까지 검열의 눈길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탄압 받으면서 만든 신문이었다. 그러나 민족의 염원과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면서 생을 이어가던 민중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은가.

‘문맹퇴치운동’을 시리즈 첫 회, 제1경으로 선정했던 것도 신문이 벌였던 민족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려는 의도였으리라. 말을 지키지 못하는 민족은 자멸한다. 지식인과 선배 언론인들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민족의 얼을 지키려면 우리의 글을 가르쳐야 한다. 신문이 벌인 독립운동이었다. 나라 잃은 민족에게 신문은 교육자요, 정부였던 것이다.

민립대학 설립운동, 어린이운동, 물산장려운동으로 이어지는 100경도 민족의 역량을 배양하려는 목적이었다. 독립된 나라를 찾고 영광과 번영의 내일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신문사 최초의 백두산 탐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사당 개수, 문화유산 보존운동도 민족정기 함양이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조선의 노래’를 제정하여 널리 보급하고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면서 이를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하도록 하였다.

3·1운동의 열기가 식지 않았던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된 동아일보는 일제 패망 5년 전인 1940년 8월 10일에 말문을 닫았다. 발행기간으로는 20년 4개월 10일이다. 이 가운데 네 차례의 정간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던 1년 6개월 22일은 제외하고 계산해야 한다. 하지만 발행기간의 계산은 의미가 없다. 신문이 중단되었다 해도 발행되던 시기 못지않은 의미가 있었음을 이심전심으로 누구나 알고 있었다. 저항에 대한 보복의 영광스러운 ‘입 막힘’이었던 것이다.

신문은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소개하고 민중을 이끌었던 선구자요, 스승이었다. 구습 타파, 생활개신운동도 신문이 사회적 이슈로 만들 수 있었다. 집회 결사의 자유, 언론자유는 차라리 꿈이었고 사치였다. 그래도 외쳐야 했다. 한 줄이라도 더 쓰고 신문에 실으려 했다. 수백 회의 압수와 삭제, 네 차례의 정간이라는 상처를 남기면서도 신문은 있어야 했다.

문인들의 등용문이자 작품 발표의 무대도 신문이었다. 전통은 오늘까지 이어 내려온다. 지식인의 고뇌,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과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 바쳤던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는 감회는 언제나 새롭다. 항일투사 이봉창 김좌진 김지섭 나석주. 스포츠 영웅 손기정의 세계 제패. 총독부는 알고 있었다. 이들의 활동을 알리는 동아일보의 사설과 기사가 에둘러 무슨 뜻을 전하는지를.

신문은 자랑스러운 역사만 비추는 거울은 아니다. 추악한 친일파의 모습도 남아 있다. 신문은 역사의 실체를 보여주는 유품이면서 그 시대를 거쳐 오늘을 이어주는 사상의 그릇이다. 스포츠, 음악, 새로운 사상과 문물의 도입도 신문의 사명이었다. 어찌 100개의 풍경만으로 모두 그려낼 수 있었으랴. 90주년 동아일보의 심층적인 새로운 기획도 기대된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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