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앞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면 국군포로 문제를 공식 의제로 삼겠다고 밝히는 등 적극적인 해결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국군포로가 중국을 통해 비공식 경로로 귀환하면서 겪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동아일보는 귀환한 국군포로들의 국내 정착을 돕고 있는 국군포로 Y 씨(80·2000년 귀환)와 6·25국군포로가족회 관계자, 전문가들을 통해 △위험 △추악 △갈등 △시간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로 국군포로 귀환의 이면을 들여다봤다.》
①위험한 탈북 中공안에 체포될까 떨고 남겨진 北가족 갖은 고초
2005년 어느 날. 함경북도 무산의 국군포로 S 씨(80)는 브로커로부터 북한 지역의 두만강 인근에서 탈북한 딸을 만나 돈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딸은 없었다. 브로커만 나타나 한국에 가면 동생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6·25전쟁 이후 50여 년. 눈물겹게 가고 싶은 고향이었지만 당장은 북한의 아내와 4남매를 버릴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왔다. 브로커에게 매수된 북한 군인들이 “가서 돈만 받아오라”고 수차례 회유했다. 아내와 함께 만난 브로커들이 다짜고짜 두만강을 건너게 했다. 국경을 넘자 브로커들은 돌아가겠다는 S 씨를 “몽둥이로 쳐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S 씨는 결국 중국 공안에 발각돼 체포됐다. “이제 끝이구나” 싶었지만 마침 국군포로 한만택 씨 북송 사건이 한중 간 외교 이슈로 비화되면서 2개월 만에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행복하지는 못했다. 북한에 있는 큰딸이 이 일로 10년형을 받고 정치범교화소에 수용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동생이 한국에 살아 있다는 브로커의 말도 거짓이었다.
K 씨는 2000년 중국에 가면 한국에서 온 형제들에게서 돈을 받아 북한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브로커의 말에 속았다. 중국에서 만난 브로커들은 “북한으로 돌아가면 탈북자로 몰린다”고 협박했다. K 씨는 한국에 온 뒤 북한의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브로커들에게 수천만 원을 줬으나 재회하지 못한 채 2008년 쓸쓸이 세상을 떠났다.
Y 씨는 “국군포로들은 누구보다 자유를 갈망한다. 하지만 귀환 의사도 묻지 않고 무작정 탈출시키는 건 문제다”라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브로커가 다짜고짜 탈북시키면 중국에서 체포 위험이 높아지고 그만큼 정부의 외교적 대응도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②추악한 브로커 시장 ‘국군포로=돈’ 장삿속에 中-韓 브로커 번갈아 갈취
또 다른 K 씨(79)는 2008년 두만강을 넘자마자 중국 내 브로커로부터 무조건 ‘5000만 원을 지불하겠다’는 각서를 쓰도록 강요받았다. 이 브로커는 3000만 원을 받아 챙겼다. 아무 것도 몰랐던 K 씨는 한국에 온 뒤 통상 브로커 비용이 3000만 원이 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중국 내 브로커는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한국 브로커에게 “K 씨가 5000만 원을 주기로 했다”며 “나는 3000만 원만 받았고 이 중 1000만 원은 북한에 있는 K 씨의 아들에게 줬다”고 주장했다. K 씨에게 추가로 돈을 받으라는 얘기였다. 한국 브로커는 K 씨에게 3000만 원을 요구했다. 협박에 지친 K 씨는 결국 브로커에게 1000만 원을 줬다.
2008년 한국에 온 H 씨(42)는 북한에서 사망한 국군포로의 아들이다. 국군포로 O 씨(79)와 함께 북한을 탈출했으나 중국 브로커는 그가 국군포로가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했다. 북송 위기에 처한 그는 옌지(延吉)의 한 가정에 도움을 요청해 한국의 삼촌과 통화했다. 삼촌의 지원으로 다른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한국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H 씨가 하나원 교육을 받는 동안 브로커는 H 씨의 삼촌에게서 H 씨의 아내와 자녀도 빼왔다며 3000만 원을 가로챘다. 하나원 교육을 마친 H 씨는 “의사도 묻지 않고 가족을 탈북시켜 거액을 갈취했다”며 브로커를 고소했다.
정부 소식통은 “국경을 넘은 직후 국군포로에게 한국의 가족과 약속한 탈북 비용보다 터무니없는 비용으로 이중계약을 하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③정착금을 둘러싼 갈등 6억∼8억원… 가족이 눈독… 친척과 소송 벌이기도
정부는 귀환 국군포로에 대해 북한에 억류된 기간을 복무연한으로 계산해 정착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정착금은 6억∼8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브로커는 거액의 정착금을 미끼로 한국의 국군포로 가족과 친척에게 국군포로를 탈북시키라며 접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Y 씨는 “귀환 국군포로 10명 중 7명은 정착금 문제 때문에 한국의 형제나 친척과 사이가 멀어진다”고 말했다.
C 씨(81)는 2005년 한국의 조카사위가 브로커를 통해 탈출시켰지만 C 씨의 친척들이 정착금을 관리해 주겠다며 사실상 돈을 가로챘다. C 씨는 노환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고 조카사위는 북한에 있는 C 씨의 딸(36)을 탈출시켰다. 한국에 입국한 딸은 친척들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C 씨는 현재 딸과 함께 살고 있다.
한 국군포로의 말에 따르면 2007년 귀환한 P 씨(82)의 경우 그의 아들은 “아버지를 한국에 오시게 한 게 후회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P 씨가 귀환한 뒤 정착금을 직접 관리하자 “아버지가 북한에 있을 때는 국가보훈처에서 정기적으로 지원금이라도 받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들이 P 씨를 탈북, 귀환시킨 것은 혈육의 정 때문이 아닌 정착금 때문이었던 셈이다.
이런 문제가 반복되자 정부는 2008년 국군포로의 정착교육 제도를 마련했다. 그러나 귀환한 국군포로 79명 중 이 교육의 혜택을 받은 국군포로는 5명뿐이다. 정부는 정착금을 연금 형태로 매달 나눠 지급하거나 주거지원금 대신 임대주택을 마련해주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④이젠 시간이 없다 대부분 80세 훌쩍 넘어 情 나눌 가족 사라져가
Y 씨는 1953년 포로가 돼 함경남도의 아연 광산으로 끌려갔다.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 주석을 평양에서 만났을 때 많은 국군포로가 귀환의 기대를 가졌지만 헛된 꿈에 불과했다. 그렇게 23세의 젊은이는 2000년 70세가 됐다. 그해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지만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희망을 잃었다. 결국 중국 보따리장수를 따라 두만강을 건넜다.
Y 씨는 이명박 정부가 국군포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것에 대해 옳은 방향이라고 전제하면서도 “1994년 고 조창호 소위의 귀환 이후 왜 진작 이런 움직임을 시작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국군포로 대부분은 80대를 넘어섰다. “싫든 좋든 북한에서 후손이 생겼을 뿐 아니라 고향이 아무리 그리워도 이제 여생이 없다고 생각할 만한 나이가 됐다”는 것이다. 조 소위의 귀환 당시 국군포로는 대부분 60대여서 젊은 시절의 경험을 나눌 가족이 생존했지만 정부의 무관심 속에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가족의 정을 느낄 친척마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남북대화를 통해 북한에 있는 가족을 고려한 정상적, 공식적인 방식으로 국군포로가 송환돼야 하며, 이에 앞서 생사확인이 정확히 이뤄져야 현재처럼 비공식 경로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국군포로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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