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칼엔 총칼로” 의병 - 독립전쟁 들불처럼 번지다
1907년 이후 의병전 2820회
‘청산리’ 등 해외 투쟁 불길… 국내외 각종 의거도 잇달아
《일제강점기 일제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민족말살정책으로 일선융화(日鮮融和)를 획책했지만 조선인들은 무장 항일투쟁과 애국계몽운동으로 민족혼을 지켜나갔다.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고 경술국치가 터지자 국내외에서 크고 작은 전투로 일제와 맞서며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안중근 강우규 윤봉길 나석주 의사처럼 일제의 심장부를 처단하려는 의열투쟁도 잇달았다.》
“성모(聖母·명성황후)께서 변(變)을 만남은 실로 천고에 없는 강상(綱常·삼강오륜)의 대변(大變)이고 신하로서 모두 통분하는 바이다. 그러나 아직도 복수를 하지 못하니 뜨거운 피가 배 속에 가득 차 그대로 참을 수 없어 처자와 영결(永訣)하고 대의를 일으켜 흉적을 토벌하고자 미아(迷兒) 영정(永井)을 형께 보내 부탁하니 살펴주기 바라오.”
명성황후가 시해됐다는 소식을 들은 유생 문석봉(1851∼1896)은 분함에 치를 떨었다.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친구에게 자식을 부탁하는 편지에는 그의 충정이 잘 드러나 있다. 1895년 9월 18일(음력) 대전 유성장터에서 그가 이끈 유성의병은 명성황후 시해에 분노한 조선의 첫 을미의병이었다.
○ 국모의 원수를 갚고 국권을 회복한다
지난달 24일 찾은 대전 유성구 유성장터는 마침 장날이어서 북적거렸다. 생선가게 뒤 ‘장터공원’이라는 이름의 작은 공원에는 ‘을미의병의 효시 유성의병 사적비’가 있었다. 복잡한 시장과 달리 사적비 앞은 한산했다. 독립된 나라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의병의 영혼들의 숨결이 느껴졌다.
의병전쟁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독립전쟁으로 이어지는 대일무력항전의 시발점이다. 조선 말 의병은 1894년 갑오의병부터 시작하지만 을미사변 직후 본격화하는데 그 선두에 문석봉의 유성의병이 있으며 이후 을사(1905), 정미(1907)의병을 거쳐 무장투쟁으로 항일의 역사가 이어진다.
의병전쟁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계기로 게릴라전으로 바뀌면서 활발해졌다. 1908년 의병들은 ‘13도창의군’이라는 연합부대를 만들어 이인영, 허위를 주축으로 서울 탈환작전을 감행하면서 일제와 1000여 회나 전투를 벌였다. 일제는 의병의 저항이 거세지자 1909년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여 전라도 지역에서 1만8000여 의병이 죽임을 당했다.
○ 독립전쟁을 벌이다
반식민지 상태에서 펼쳐졌던 구국운동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독립운동으로 바뀌었다. 일제의 토벌 작전으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진 의병들은 만주의 북간도와 서간도,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주해 독립군이 됐다.
1910년대 독립군을 양성하고 기지를 건설하는 기간을 거쳐 1920년대부터 무장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1915년 국내에서 창설된 대한광복회는 8도에 지부를 두고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 양성, 친일부호 처단 등 항일 투쟁을 벌였다. 의병장 허위의 제자인 박상진이 주도했다. 충청지역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충청문화연구소의 이성우 연구교수는 “대한광복회 충청지부에 있던 김좌진 장군은 1918년 조직망이 발각되기 직전 만주지부로 이동해 화를 피할 수 있었다”며 “대한광복회는 만주 등에서 군대를 양성한 뒤 국내로 진격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목표를 세웠다”고 말했다.
올해 90주년을 맞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은 각각 1920년 6월과 10월에 거둔 승리였다. 청산리대첩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일본의 정규군을 대파함으로써 독립전쟁의 이정표가 됐다. 한 해 전 3·1운동은 항일투쟁의 정신적 원동력이 됐을 뿐 아니라 민족의 대단결을 이룸으로써 독립운동 기반을 확대시켰다.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이 들어오면서 독립운동의 지향점이 다양해졌다. 진영별로 독립 후 건국할 나라에 대한 청사진이 달랐지만 민족의 군대를 양성해 미국 중국 소련 등과 함께 참전하자는 ‘독립전쟁론’에는 대부분 뜻을 같이했다.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는 1940년대 항일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 국내외에서 이어졌던 의열 투쟁
일제의 원흉을 암살하거나 식민통치기구를 폭파하는 의열 투쟁은 적은 인원이었지만 국내외에 한민족의 기개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1908년 3월 미국에서는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는 외교활동을 벌인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했고 1909년 10월 중국 하얼빈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다. 1919년 9월에는 일제 식민통치 중심부인 서울에서 강우규 의사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폭탄을 던졌고, 1926년 12월 나석주 의사는 한국을 착취할 목적으로 설립된 서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는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고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 등을 죽임으로써 중국 장제스(蔣介石)로부터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한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는 격찬을 들었다.
김용달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연구가 드러나고 성공한 것 위주로 진행된다는 측면을 고려하면 밝혀진 항일투쟁의 역사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실체 모르는 ‘일제 학살극’ 독립군 토벌 빌미 간도참변… 한인 피해규모 등 규명안돼
일제는 한민족의 항일투쟁에 잔혹한 학살로 보복했다. 일제의 만행 중 대표적인 사건이 1920년 청산리대첩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수개월에 걸쳐 독립군 토벌을 빌미로 간도의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한 경신참변(간도참변)이다.
당시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마틴은 그 참혹상을 수기로 남겼다.
“10월 20일 무장 일본군 보병 한 부대가 마을을 포위한 뒤 남자라면 노인과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집 밖으로 끌어내 사살하고, 채 죽지 않은 자는 불 속에 집어넣었다. 일본군은 만행을 저지르고 돌아가 천황탄생일을 축하했다.…”
일제는 ‘조선인 꼬마들이 전선을 잘랐다’는 중국 농부의 신빙성 떨어지는 말을 구실로 12, 13세 어린이들의 목을 베 전선에 매달아 놓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통계로는 간도참변의 일부 기간인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30일까지 북간도 서간도 일대에서 3469명이 살해됐고, 민가 전소도 3209건이나 됐다. 당시 동아일보 통신부장 겸 조사부장이었던 장덕준은 경신참변 취재를 위해 만주로 갔다가 순직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연구는 전체 피해에 대한 통계도 없을 만큼 미흡하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의 탄압과 학살에 대한 연구도 대체로 부진하다. 동북아역사재단이 2006년부터 매년 ‘일제에 의한 피해에 관한 연구’를 공모하고 있으나 참가자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1990년대 들어서야 한일관계에서 역사적 사실로 인식될 만큼 피해 연구는 아직도 해야 할 게 많다”며 “한일 관계 정립을 위해서는 서로가 인정할 수 있는 피해를 객관적으로 조사하는 게 먼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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