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체벌 대신 ‘글쓰기 벌’… 생각이 자라고 성적이 오르네요”

  • 동아닷컴
  • 입력 2010년 3월 2일 03시 00분



이현중, 자기주도 공부 일깨우는 이색 인성교육
시행 3년만에 졸업생 10%가 자사 - 특목 - 예술고 진학
과학고 단 1명 → 작년 올림피아드 수상 20건 괄목상대

《이현중학교(경기 용인시 수지구)는 올해 졸업생 400명 중 약 10%가 자립형사립고, 특수목적고, 예술고에 합격하는 놀라운 진학 성적을 보였다.
이중 25명은 민족사관고(1명), 한국외국어대부속용인외고(10명), 안양외고(4명), 경기외고(2명), 과천·수원·고양·동두천외고(각 1명), 한국과학영재학교(1명), 경기과학영재학교(3명)에 합격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국적인 규모의 천문·지구과학·물리·화학·생물·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지난해에만 20여건의 수상실적을 거뒀고, 2009학년도 과학교육 우수학교로 교육감 표창도 받았다.
지역 학부모들 사이에선 ‘자녀를 보내고 싶은 학교’로, 학생들에게는 ‘원하는 고교에 진학할 수 있는 학교’로 불릴 만큼 인기가 높은 이현중학교의 놀라운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지난 달 21일 졸업식이 열린 이현중 강당. 단상 위 커다란 스크린에 영화 ‘아바타’를 패러디한 3학년 9반의 졸업 기념 동영상 ‘구반타’가 상영됐다. 학생들이 직접 편집한 영화 장면에 맞춰 ‘지금부터 3학년 9반 학생들을 소개할게’라는 자막이 올라갔다. 2분 정도의 편집영상이 지나자 학생들의 사진과 이름, 좌우명이 담긴 화면이 슬라이드 쇼로 상영됐다.

사진 속 익살맞은 남학생의 표정과 함께 ‘늦었다고 생각할 땐 이미 늦었다’ 같은 위트 있는 좌우명이 소개될 때마다 강당에 모인 졸업생과 학부모, 교사들 사이에서 박수와 웃음이 터졌다. 3학년 변혜진 양(15)은 “한 시간 반의 졸업식이 진행되는 동안 떠들거나 지루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면서 “학급과 학교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선배들의 동영상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특별한 졸업식은 이 학교가 중시하는 인성교육을 엿볼 수 있는 ‘결정판’이다. 학교는 바른 인성과 공동체 의식을 갖춘 창의적인 인재 양성을 목표로 교육한다. 철저한 인성교육이 선행되면 안정적인 학습 분위기가 조성되고 전반적인 학생들의 성적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

이 학교에서 3년 전부터 시행해온 인성교육 프로그램 ‘생각하는 벌’을 살펴보자. 박귀준 교장을 포함한 모든 교사는 학칙을 어긴 학생들에게 체벌 대신 행동교정을 유도하는 글을 쓰도록 지도한다. 잘못한 행실의 정도, 제출한 글에 담긴 반성의 정도에 따라 1일, 3일, 일주일 프로그램 등 글을 쓰는 횟수가 달라진다.

3학년 김연준 군(15)은 시험기간에 1층 교장실 앞을 떠들며 뛰어가다 교장선생님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함께 뛰던 친구들은 도망갔고, 혼자만 지목당한 김 군은 왜 자신만 걸려야 하는지 억울한 마음을 토로했다.

이현중에서 체벌 대신 실시하는 인성교육 프로그램 ‘생각하는 벌’. 모든 교사가 학생들이 체벌 대신 쓴 글을 직접 첨삭한다.
이현중에서 체벌 대신 실시하는 인성교육 프로그램 ‘생각하는 벌’. 모든 교사가 학생들이 체벌 대신 쓴 글을 직접 첨삭한다.


박 교장은 김 군에게 시험이 끝난 후 4일간 ‘생각하는 벌’을 수행하도록 지시했다. 첫째 날 김 군은 ‘나의 미래와 뛰었을 때의 일’이라는 주제로 A4 용지 한 장짜리 글을 써 교장선생님에게 제출했다. 김 군은 ‘뛰다가 걸렸을 때 도망갈 마음을 먹었던 점과 도망간 친구들이 내 친구들이 아니라고 거짓말한 것을 반성한다. 시험 당일 벌을 내렸다면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을 텐데 시험공부를 하도록 배려해주신 점, 감사하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이후 김 군은 △나는 누구인가 △하품할 때 입을 가리지 않고 하면 안 되는 이유(박 교장과 면담 시 김 군이 하품을 하자 제시된 주제) △교장선생님께 드리는 글 등 세 편의 글을 더 썼다. 박 교장은 글의 의미 있는 부분에 밑줄을 긋거나 ‘많은 것을 깨달은 발전 가능한 학생’이라고 메모하면서 꼼꼼히 글을 읽은 뒤 김 군이 충분히 반성한 것을 인정하고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김 군은 “처음에는 1시간 동안 한 페이지에 무엇을 채워야 하나 고민도 되고 솔직히 짜증도 났지만 글을 쓰다 보니 마음가짐이 달라졌고 평소 생각하지 않았던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생각하는 벌 외에도 이 학교 학생들은 글을 쓸 기회가 많다. 학생들은 △내 성격은 이래서 ‘짱’이에요 △나는 이럴 때 가출하고 싶다 △나에게 있어 가족의 의미는? △성형에 대한 나의 생각 △앞으로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등 40여 가지 주제 중 선택해 한 해 15편의 글을 쓴다. 평소 국어 수행평가가 아니면 좀처럼 글을 쓸 기회가 없는 학생들은 글쓰기를 통해 사고력과 창의력을 높인다. 자신, 가족, 가치관, 꿈 등에 대해 생각해볼 만한 주제이기 때문에 생활지도까지 연계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학생들의 진학을 염두에 두고 맞춤형 지도를 했던 노력도 높은 진학 성과에 도움이 됐다. 이현중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단 한 명의 졸업생을 과학고에 진학시키는데 그쳤다. 이에 학교는 지난해 수학·과학에 재능이 있거나 과학영재학교, 과학고를 목표로 한 학생들을 위한 동아리를 만들었다. 학생들은 매일 점심시간에 과학실에 모여 30∼40분씩 스터디 모임을 가졌다. 순번을 정해 과학고 기출 구술문제를 뽑아서 친구들과 나눠보고 풀이과정을 설명하거나 한 가지 주제를 정해 토론했다. 과학탐구대회에 출전하기 전엔 3, 4명씩 조를 짜서 ‘우리나라 전통에서 찾을 수 있는 과학기술’이라는 주제로 측우기, 석빙고, 에밀레종, 신기전 등에서 과학의 원리를 찾아 토론했다.

이 동아리 출신으로 경기과학영재학교에 진학한 안은진 양(16)은 “같은 목적을 가진 친구들과 토론하고 대화하면서 자투리시간도 쓸모 있게 이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같은 학교에 진학한 박용천 군(16)은 “과학영재학교의 3단계 시험에서 수학·과학 논술, 서술형 문제가 출제됐는데 친구들과 매일 과학 관련 주제를 놓고 토론했던 것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학교는 수학시험이 비교적 쉽게 출제돼 우수한 학생들의 수학·과학 심화학습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라 시험의 난도도 조절했다. 문제가 어려워지자 처음에는 난감해하던 학생들이 더욱 열심히 공부했고 전반적인 수학·과학 성취도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

박 교장은 “인성교육이 제대로 되면 학생들에게 자기주도적, 자발적, 적극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서 “자신의 꿈과 미래에 대해 생각해본 학생들이야말로 제대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하기 때문에 좋은 진학실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 용인=봉아름 기자 er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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