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50년]50년전 오늘, 대전고생 1000명 독재 맞서 거리로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8일 03시 00분


1960년 3월 8일 오후 대전 중구 대전공설운동장(지금의 한밭종합운동장) 인근 골목. 대전고 학생들이 시위 도중 곤봉을 휘두르며 저지하는 경찰과 맞서고 있다. 사진 제공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1960년 3월 8일 오후 대전 중구 대전공설운동장(지금의 한밭종합운동장) 인근 골목. 대전고 학생들이 시위 도중 곤봉을 휘두르며 저지하는 경찰과 맞서고 있다. 사진 제공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임원들이 4일 대전 서구 둔지미공원에 세워진 3·8민주의거기념탑에서 50년 전을 회고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원옥 부의장(대전상고), 변병학 이사(대전상고), 최우영 공동의장(대전고), 전희남(대전상고), 김선균 김영광 성주호
이사(이상 대전고). 대전=지명훈 기자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임원들이 4일 대전 서구 둔지미공원에 세워진 3·8민주의거기념탑에서 50년 전을 회고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원옥 부의장(대전상고), 변병학 이사(대전상고), 최우영 공동의장(대전고), 전희남(대전상고), 김선균 김영광 성주호 이사(이상 대전고). 대전=지명훈 기자
■ 4·19 촉발 대전 3·8시위

자유당 부정부패에 불만 고조
어린그들 “학원자유” 외치며 행진
경찰 폭행에 시민들도 학생 도와

불의 저항한 민주화운동 주역들
군사정권때 정보기관 사찰대상
잊혀진 현대사 재조명 필요


4일 오후 대전 서구 둔산동 둔지미공원 3·8민주의거기념탑.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와 독재에 항거해 1960년 3월 8일과 10일 각각 대전고 시위와 대전상고 시위를 이끌었던 주역들이 이곳을 찾았다. 대전고 출신인 최우영 충남대 명예교수, 김선균 한국자유총연맹 충남도지회 부지회장, 성주호 전 충청하나은행본부장, 김영광 전 대전MBC 보도국장, 대전상고 출신인 이원옥 대전시의정회 사무총장, 전희남 새한자동차공업사 대표, 변병학 씨(자영업). 모두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임원인 이들은 매년 한 번은 찾는 기념탑이지만 50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감회에 젖어 당시 시위구호인 “학원자유 보장하라”를 다시금 목청껏 외쳐봤다. 경찰 저지선을 뚫다 부상당하고 연행된 학우들, 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감싸주던 시장 상인들이 아련히 떠올랐다. 기념사업회 공동의장인 최 교수는 “고교생이 교정을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는데 부모님들은 걱정하면서도 크게 역정을 내지 않으셨다”고 회상했다.

○학생시위에서 정치적 구호 첫 등장

2·28 대구 학생시위 이후 울분은 깊어만 갔다. 당시 대전고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은밀히 시위를 준비했다. 낌새를 챘는지 교장은 7일 오전 교장 관사로 학생 간부들을 불러 “내일 민주당 정견 발표회에 한 명도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는 되레 불만을 고조시켰다. 김영광 전 국장은 “그렇지 않아도 학교에선 친여 성향의 ○○신문을 강제 구독하도록 했고 수업시간에 이승만 박사의 미국 망명시절 연설을 들어야 했고 교문을 나서면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목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교장의 지시가 있던 그날 오후 8시 대전 동구 중동 한 학우의 집에서 박제구(학도호국단장), 정일근, 장연수, 김국태, 전성, 박명근, 박선영, 최정일 등 호국단 간부 10여 명이 모여 8일 오후 2시 야당 지도자인 장면 박사의 유세가 열리는 대전공설운동장(지금의 한밭종합운동장)을 거쳐 충남도청까지 행진을 벌이자고 결의했다. 시민이 많이 모이는 만큼 호응과 파급효과가 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배격한다 △학생 동태를 감시 말라 △○○신문 강제구독 배격한다 등의 결의문도 작성했다.

○상인들 피투성이 학생 감싸

학생들의 시위계획은 이미 탄로나 있었다. 8일 오전 9시경 교장은 학생 간부들을 관사로 불러 시위 철회를 설득했다. 하지만 이 소식이 학교전체에 알려지면서 학생들은 술렁였다. 오후 2시경 최정일 기율부장이 “나가자”고 외치자 1000여 명의 학생들은 교실을 박차고 나섰다. 의식 있는 교사들은 학생들을 막는 척하면서 오히려 독려했다.

계획된 행진로는 대전고∼대흥 사거리∼공설운동장∼인동시장∼충남도청이었고 경찰은 대흥 사거리와 공설운동장, 대전역 인근인 목척교 등 3곳에 저지선을 쳤다. 경찰은 공설운동장에서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 시위대를 분산시킨 뒤 말을 타고 쫓아가 곤봉과 소총으로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연행했다. 학생들은 대흥동, 인동, 문창동 일대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쫓기다 아무 집에나 뛰어 들어갔지만 주민들은 말없이 숨겨줬다. 당시 시위학생이었고 현재 중앙시장에서 완구점을 운영하는 안선호 중앙번영회장(66)은 “중앙시장으로 쫓기던 학생들은 상인들이 상품 진열대 밑이나 가게 뒤쪽 물품창고로 피신시켜줘 화를 면했다”며 “그 고마운 분들은 지금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당시 시위로 80여 명이 연행됐고 주모자로 분류된 5명은 다음 날 새벽에야 풀려났다.

○3·15 및 4·19로 이어지는 교량 역할

3·8시위와 이틀 뒤의 3·10시위는 2·28시위의 불길이 계속 타오르게 하는 역할을 하면서 곧바로 여야 정치권의 공방으로 비화됐다. 자유당은 “신성한 학원을 도구로 삼지 말라”며 민주당의 배후 조종 의혹을 제기했다. 민주당은 “빈주먹으로 합법적 시위를 전개하는 학생들을 총과 곤봉으로 난타해 유혈사태를 빚은 경찰과 여당은 책임지라”고 반박했다. 대전고 재학 시절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정구종 동서대 일본연구센터 소장(전 동아닷컴 사장)은 “3·8시위의 파급효과는 서울 등 전국 고교생들의 반독재 항거 데모로 이어졌다”며 “불의와 부정, 부당에 맞서 저항한 시민의식의 발로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군사정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아 김영삼 정부에 와서야 기념식을 열 수 있었다. 박제구 씨는 “시위 당시는 물론 그 후에도 오랫동안 유공자 아닌 주동자로 인식돼 정보기관의 사찰대상이었다”며 “잊혀진 민주화운동에 대한 재조명이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3·8민주의거 50주년 기념식 총괄회장인 김선균 부지회장은 “8일(오전 11시) 대전시청에서 5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른다”며 “앞으로 세미나도 열고 기념책자도 발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전=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 3·8 참가못한 대전상고, 이틀 뒤 ‘거사’ ▼
이기붕 선거유세 열리던 10일
전교생 700명 도심진출 행진


3·8시위는 본래 대전고와 대전상고, 대전공고, 대전여고, 보문고 등 대전지역의 여러 고교가 같이 벌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미리 준비를 해온 대전고와 달리 다른 고교들은 불과 이틀 전에야 연락을 받아 시간이 촉박해 시위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나마 시위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감시가 심했다. 여러 고교가 8일 시위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던 중 대전상고가 단독으로 시위를 계획했다. 이 학교는 2002년 인문고로 전환하면서 교명이 ‘우송고’로 바뀌었다. 대전상고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자유당 이기붕 부통령 후보의 선거유세가 열리는 10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하지만 이 시위계획도 탄로가 나버렸다. 연이은 시위에 비상이 걸린 경찰은 9일 전격적으로 채재선 학도호국단장 등 학생간부 7, 8명을 연행했다. 하지만 경찰의 이 같은 행동은 학생들을 더욱 자극했다. 2학년 이원옥 변병학 전희남 씨 등 다행히 이사했거나 집이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연행을 모면한 간부들이 계획대로 시위를 주도했다.

1960년 3월 10일 오전 9시경 대전 동구 자양동 대전상고. 이원옥 씨 등은 전교생 700여 명을 운동장에 집합시킨 뒤 시위의 취지와 구호, 스크럼 짜는 법 등을 간단히 설명해주고 곧바로 교문 밖으로 진출했다. 워낙 기습적으로 감행해 교문을 벗어날 때까지 학교에서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동구 신안동 굴다리 부근인 파출소 앞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이 저지선은 그나마 수월하게 뚫었으나 다시 인근 대전우체국 앞의 2차 저지선은 견고해 시위대가 분산됐다. 대전역과 목척교를 거치거나 중앙시장과 대흥동 사거리를 거쳐 대전경찰서(지금의 중부경찰서) 앞까지 행진했다.

경찰과의 충돌로 수십 명이 다치고 연행된 뒤 낮 12시경에야 시위가 일단락됐다. 학교 측과 경찰은 “대전상고 시위는 연행학생 석방을 위한 시위”라며 시위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축소했다. 대전고 시위에 참여했던 대전시의정회 사무총장인 이원옥 씨는 “대전고 시위나 대전상고 시위 모두 3·15마산시위와 4·19혁명에 이르는 교량 역할을 했다”며 “당시의 대전지역 학생들의 시대정신으로 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전=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대전 학생시위를 상세하게 보도한 1960년 3월 9일자 동아일보 3면(사회면).
대전 학생시위를 상세하게 보도한 1960년 3월 9일자 동아일보 3면(사회면).
▼ “대전 학생시위 보도 동아일보 가장 정확” ▼
‘3·8민주의거’ 자료집


대전지역의 3·8 대전고 시위 및 3·10 대전상고 시위 참가자들과 이들이 발간한 자료집 등은 동아일보가 당시 시위 상황을 가장 정확하고 비중 있게 보도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와 대전충남 4·19혁명동지회가 2005년 8월 발행한 253쪽짜리 자료집 ‘3·8민주의거’는 당시 시위에 대한 여러 신문의 보도 상황을 상세히 분석해 소개하고 있다. 이 자료집에 따르면 동아일보는 3·8시위 다음 날인 3월 9일자 3면(사회면)의 대부분을 할애해 시위 소식을 전했다. 하루 전체 발행면수가 4개면인 시절이었다.

동아일보는 ‘대전서도 천여학생(千餘學生) 데모’라는 톱기사를 통해 경찰과의 충돌로 유혈사태가 빚어진 사실과 학생들의 주장을 상세히 알렸다. 경찰에 검거된 학생들의 눈물의 호소도 전했다. ‘경찰과 한때 육박전’이라는 제하의 시위 상보를 통해 시위계획이 사전에 당국에 탐지된 사실, 교장의 설득을 듣다 돌연 봉기에 돌입한 사실, 경찰이 배후관계를 추궁한 사실 등을 자세히 보도했다.

또 미국 통신사인 UPI가 대전 시위를 보도했다는 기사를 실어 외국에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렸다.

자료집은 “‘대전서도 천여학생 데모’라고 보도한 동아일보 이형연 특파원(당시에는 지방에 파견된 기자를 특파원이라고 불렀음)의 기사가 가장 정확했다. 다른 신문에서는 ‘400명’, ‘300명’, 또는 ‘수백명’으로 보도했다”고 밝혔다. 많은 신문이 시위 규모를 적게 쓴 이유에 대해서는 “데모 대열이 진압저지선을 통과할 때마다 여러 갈래로 분산됐는데 그 일부만을 봤기 때문으로 보인다”며 “하지만 당시 지탄을 받던 한 친여 신문은 ‘200명 시위’라고 보도했는데 이것은 의도적인 축소 같다”고 지적했다. 당시에는 시위대의 규모가 정권에 대한 불만과 반발의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당국은 파장을 줄이기 위해 시위 참가자 수를 의도적으로 축소하려 했다.

동아일보는 3·10 시위도 3월 11일자 3면에 보도했다. ‘또 학생 데모 사건…이번에는 상고생이’ 등의 기사를 통해 상세한 시위 소식을 알렸다. 연이은 시위에 바짝 긴장한 정부 및 정치권의 반응도 소개했다.

대전=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