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국민의 공분(公憤)을 불러일으켰던 이유리 양(13) 살해사건 피의자 김길태 씨(33)는 도주했던 보름 동안 경찰의 예상대로 범행현장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주거지인 부산 사상구 덕포1동 일대를 전전하며 경찰의 포위망 안에서 은신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날 1시간가량 경찰 조사를 받은 그는 혐의를 부인하면서 묵비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음식 없어진다” 상인 제보에 수사망 좁혀 경찰 4명 상대 격렬 저항… 1분여만에 상황 끝
김길태 “방범실태 알아봐라” 친척에 부탁도 경찰 안도… ‘공개수사후 살해’ 밝혀지면 곤혹
○ 묘연했던 보름간의 행적은?
경찰은 피로가 누적된 김 씨의 몸 상태로는 심도 있는 조사가 어렵다고 판단해 11일부터 본격 수사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날 1차 조사에서 김 씨는 비교적 담담한 어조로 범행사실을 부인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그는 “그동안 덕포동 일대 빈집과 폐가, 건물 옥상 등지에서 숨어 지냈다. 유리는 모르고, 그 집에 간 적도 없다. 그동안 라면을 먹고 술을 마셨다. 담배도 많이 피웠다”고 진술했다. “배가 너무 고프다”는 말도 여러 차례 했다. 경찰은 “김 씨가 너무 지쳐 있어 밤늦게까지 조사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김 씨는 보름간의 도피생활을 모두 사건현장 인근에서 한 것으로 확인됐다. 검거 장소는 이 양의 집과 시신 유기장소 등 사건현장과 불과 300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성폭력 범죄로 11년간 복역한 기간을 제외하고 덕포1동을 떠나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건현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김 씨는 1월 성폭력 혐의로 수배를 받자 인근에 살고 있는 친척 동생에게 찾아가 “사고를 쳤다. 사상구 일대 폐쇄회로(CC)TV 수와 모 종교시설의 방범실태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알려져 경찰은 이 부분도 조사할 예정이다. 또 이달 5일경 이 친척 동생의 집에서 옷가지 일부를 몰래 가져간 것으로 전해졌다.
김 씨는 도피 장소로 옥상 문이 열려 있던 삼락동 빌라를 선택했다. 옥상 보일러실은 온기가 있어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배고픔과 담배 금단현상을 참지 못해 시장에서 몇 차례 절도를 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 검거 순간은 영화의 한 장면
김 씨가 검거되는 순간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경찰은 “며칠 전부터 음식물이 없어진다”는 덕포시장 상인들의 신고를 접하고 이 주변에 대한 수색을 강화했다.
부산지방경찰청 소속 경찰 2명은 이날 오후 2시 44분 모 빌라 C동 옥상 문을 열었다. 김 씨와 비슷한 인상착의의 청년이 갑자기 옆 동인 B동 옥상으로 뛰기 시작했다. 건물 사이 간격은 60cm. 순간 “길태다”라고 외치며 뒤쫓았다. 김 씨는 곧장 B동과 그 옆 동인 A동 사이로 몸을 웅크렸다. 등은 A동 벽에, 양팔과 다리는 B동 벽에 대고 마치 ‘스파이더맨’처럼 벽을 탔다. 손쉽게 1층으로 내려온 김 씨는 뛰지 않고 유유히 걸었다.
그는 인근에서 순찰 중인 강희정 경사와 다시 맞닥뜨렸다. 회색 후드 티에 파란색 마스크를 쓴 남성은 김 씨 같았다. 강 경사가 그를 추격하자 몸을 돌려 도주하던 김 씨는 맞은편에 있던 이용 경사의 얼굴을 때리고 빠져나가려 했다. 뒤따르던 강 경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몸을 날려 김 씨를 덮쳤다. 이때 주민들은 “김길태다”라고 외치고 도주하는 김 씨를 막기 위해 발을 걸려고 시도하는 등 검거를 도왔다. 인근에 대기하던 동료 형사 2명도 발버둥치는 그를 제압했다. 불과 1분여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경찰은 “새벽에 내린 눈 때문에 다리를 삐끗해 1층에서 걸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 경찰, 안도 속에 긴장
장기 미제사건으로 이어질까 봐 가슴 졸여온 경찰은 일단 안도하는 분위기다. 그동안 경찰이 벌인 김 씨 검거작전은 대(對)간첩작전 수준이었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검거 지시를 내리자 부산경찰 전원(7700명)은 7일부터 비상근무에 들어갔다. 국민적 관심이 김 씨 검거에 쏠렸지만 이렇다 할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 초동수사 실패와 여러 차례 검거 기회를 놓친 게 경찰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이날 김 씨가 검거되자 경찰 고위 관계자는 “국민께 죄를 짓는 심정이었는데 사건이 해결돼 다행”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씨의 진술내용에 따라 경찰이 난처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이 양이 숨진 시점이 경찰이 공개수사에 나선 지난달 27일 이후라면 비난의 화살이 경찰에 집중될 수 있다. 경찰이 섣불리 공개수사에 나서면서 심리적 압박을 받은 김 씨가 이 양을 살해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부산범죄피해자지원센터 ‘햇살’은 숨진 이 양의 가족이 범죄피해자구조금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구조금은 범죄행위로 숨지거나 중상해를 입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서 보상을 받지 못할 때 국가에서 대신 지급하는 제도다.
부산=윤희각 기자 toto@donga.com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조용휘 기자 sile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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