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던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이 면책특권 포기 결정 직전 해외로 도주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15일 부산 해운대경찰서에 따르면 문제의 미국대사관 직원 A 씨(50)가 3일 필리핀으로 출국했다. 필리핀계 미국인으로 외교관 신분인 그가 미국대사관에 알리지도 않고 갑자기 출국한 것은 한국 사법기관의 처벌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부산 남구 감만동 미군부대 컨테이너 검사관으로 근무하던 A 씨는 지난해 11월 4일 해운대경찰서에서 피진정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았다. 부산 해운대에 주소를 두고 있는 B 씨(50·여)가 ‘2007년 9월 여객기 안에서 우연히 알게 된 A 씨가 필리핀 현지에 컴퓨터 학교를 설립하면 고액의 배당금을 돌려주겠다고 해 지난해 6월까지 2억2000만 원을 줬으나 돌려주지 않고 있다’는 진정을 접수시켰기 때문. 미국인과 결혼한 B 씨는 남편이 2006년 필리핀 여행 도중 교통사고로 숨지자 보상관계로 미국을 오가면서 비행기 옆 좌석에 탄 A 씨를 알게 됐다. A 씨는 B 씨에게 거액의 보상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외교관 신분을 이용해 접근했다. 신분이 확실하다는 점을 안 B 씨는 계약서도 없이 8차례에 걸쳐 보상금 전액인 2억2000만 원을 투자명목으로 빌려줬다. 하지만 A 씨가 임기가 끝나 미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 되어 가는데도 배당금은 고사하고 사업에 대해 아무런 얘기가 없자 지난해 9월 경찰에 진정을 하면서 그의 사기행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경찰 조사 결과 A 씨는 이 돈을 가로채 도박과 유흥비로 탕진했다. 경찰은 A 씨에 대한 면책특권을 포기해줄 것을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미국 정부는 A 씨를 상대로 자체 조사를 벌여 4개월 만인 5일 이례적으로 면책특권 포기 결정을 내렸지만 A 씨는 이미 출국한 상태였다. 외교관은 외교관용 여권과 개인여권 등 여권 2개를 발급받을 수 있는 점을 악용해 개인여권을 사용해 출국한 것. 출국한 날짜는 면책특권 포기 결정 이틀 전인 이달 3일이었다. 경찰과 B 씨는 미국 정부에서 정보가 흘러나가 A 씨가 도주한 것이라며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B 씨는 “미국 정부에서 인정한 외교관 신분을 믿고 별다른 의심 없이 돈을 빌려준 만큼 미국 정부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대사관 측은 “외교관 여권을 빼앗고 부산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령했으나 이를 어기고 출국할 줄은 몰랐다”면서 “소재를 파악해 자진 출석하도록 권유하거나 한국으로 직접 데리고 오겠다”고 해명했다. 경찰은 12일 A 씨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수배하는 한편 인터폴에 수사협조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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