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는 로절린 카터 여사. 그녀는 “아침 일찍 업무를 시작해서 오후 4시경 일을 마치고
운동이나 낚시 같은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내가 행복해야 남도 잘 돌볼 수 있습니다. 환자나 노약자를 간호하다 보면 이유 없는 자책감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나를 위한 여유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인 로절린 카터 여사(82)는 22일 ‘케어기빙(Caregiving·돌봄서비스)’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카터 여사는 “어느 사회든 주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환자나 노약자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정작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케어기버(Caregiver)’에 대한 관심은 매우 적다”며 “가족, 간병인, 요양보호사 같은 케어기버가 제대로 일하려면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자신의 모교인 조지아사우스웨스턴주립대(GSW)에 케어기빙 전문교육기관인 ‘RCI(Rosalynn Carter Institute for Caregiving)’를 설립한 카터 여사는 고려사이버대(옛 한국디지털대)의 초청으로 방한해 이 대학과 공동으로 국내 케어기빙 전문연구기관 ‘RCI-Korea’를 설립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카터 여사는 이날 행사에서 김중순 고려사이버대 총장과 케어기빙 공동연구 및 전문교육 과정 개발을 위한 양해각서(MOU)도 체결했다.
행사 후 고려사이버대 총장실에서 동아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가진 카터 여사는 피곤한 기색도 없이 “한국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올 때마다 한국인의 배려심에 감동한다”며 “아마 남편보다 내가 한국 방문을 더 즐거워할 것”이라며 웃었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
―정신건강, 아동 여성 인권보호, 빈민구제 등 여러 가지 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으신데요. 케어기빙에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개인적인 경험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외할아버지가 우리 가족과 함께 살게 됐습니다. 70세 때 우리 집에 오셔서 94세에 돌아가셨죠. 돌아가시기 전 4년 동안 계속 아프셨습니다. 당시 어머니가 얼마나 힘들게 간병했는지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우체국에 다니던 어머니는 매일 새벽에 출근해서 점심 때 할아버지 식사를 챙기기 위해 집에 들르셨습니다. 퇴근하고서도 쉬는 시간이 없었죠. 또 남편의 어머니, 형과 두 누님이 모두 암으로 돌아가시면서 케어기버가 얼마나 힘든 일을 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미국 전역을 돌며 케어기버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셨는데요. 주로 어떤 어려운 점을 호소하던가요.
“한 여성은 아픈 아버지를 돌보다가 너무 힘들고 지쳐 도망쳤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다가 죄책감이 들어서 다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여성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아픈 사람을 옆에서 돌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RCI 조사에 따르면 치매 노인을 돌보는 가족 중에서 3분의 1은 우울증에 걸려 있습니다. 또 가족 간병에 시간을 쏟다 보면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할 수 없으니 재정적 어려움을 겪을 확률이 높습니다.”
―한국에는 아직 전문 케어기빙 서비스를 받기보다는 가족이 아픈 사람을 돌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특별히 더 힘든 점이 있습니까.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케어기버의 80%는 가족입니다. 미국에는 1500만 명의 가족 케어기버가 있습니다. 대부분 무보수 노동이죠. 이들이 하는 일을 돈으로 환산하면 매년 3060억 달러어치의 노동을 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이들은 ‘외롭고 힘들다’고 호소하지만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해결책은 모르고 있습니다. 첫 단계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1987년 RCI를 설립하셨을 때 미국에서 케어기빙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이었나요.
“미국은 한국보다 고령화가 먼저 진행되면서 케어기빙 문제가 심각했지만 1980년대 후반만 해도 관심이 부족했습니다. 남편이 1981년 재선에 실패하면서 백악관에서 ‘비자발적 은퇴(involuntary retirement)’를 하게 됐죠(웃음). 이듬해 카터센터를 세우고 정신건강 이슈에 관심을 쏟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케어기빙 문제가 눈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미국 내 36개 의료복지단체에 케어기빙 프로그램이 있느냐고 문의했지만 모두 없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지금은 케어기빙 이슈가 많이 활성화돼서 전국연합체인 ‘전미퀄리티케어기빙연합(National Quality Caregiving Coalition)’도 운영되고 있습니다.”
―케어기버를 위해 어떤 지원 프로그램이 필요합니까.
“지원 프로그램에는 커뮤니티가 모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케어기버는 물론 복지기관, 기업, 사회단체가 참여해서 심도 있는 카운슬링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 가족 케어기버들은 전문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을 위한 전문적인 교육 프로그램도 갖춰야 합니다. RCI-Korea는 한국 상황에 맞는 케어기빙 프로그램을 온라인으로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카터 전 대통령 부부는 퇴임 후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며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편히 은퇴 생활을 즐기지 않고 적극적인 사회활동에 나서고 계신데, 무슨 계기가 있었나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즐겁습니다. 남편과 저는 사회적 위치 덕분에 도울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지요.”
―외국 방문 때 꼭 부부가 동행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미국 정치인 부부 중 가장 이상적인 파트너십이라는 얘기도 있는데요.
“저희도 간혹 싸웁니다(웃음). 다만 저희 부부는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서로 상대방의 공간을 지켜주려고 노력합니다.”
카터 여사는 인터뷰에서 케어기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다. 14세 때 아버지가 백혈병으로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가 간병한 얘기를 할 때는 눈물을 짓기도 했다.
카터 여사는 “9년 전 집짓기 운동인 해비탯의 봉사자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인들이 보여준 열정과 친절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며 “이번에도 한국과 함께 의미 있는 케어기빙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정미경 차장 mickey@donga.com
22일 열린 고려사이버대와 로절린 카터 케어기빙 인스티튜트(RCI)의 RCI-Korea 설립 양해각서(MOU) 교환식.
김정배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켄들 블랜처드 미국 조지아 주 사우스웨스턴주립대 총장,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로절린 카터
여사, 김중순 고려사이버대 총장(왼쪽부터)이 참석했다. 사진 제공 고려사이버대■ ‘RCI-Korea’ 돌봄 교육이란보는 서비스다. 서비스를 하는 사람은 케어기버(Caregiver·돌봄 제공자) 또는 돌보미라고 부른다. 간병인, 요양보호사, 간호사 같은 전문직업인뿐만 아니라 가족도 포함한다. RCI-Korea는 돌봄에 대한 전문지식뿐만 아니라 돌봄 제공자가 스스로를 돌보는 방법도 가르친다. 지금까지 돌봄 교육은 돌봄을 받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어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의 스트레스는 간과해 왔다.
지난해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519만2710명으로 전체 인구의 10.7%. 노인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돌봄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보건복지부는 올해 요양보호사 5만 개, 복지 서비스 1만 개 등 모두 6만 개의 돌봄 서비스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기간 돌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육체적, 정신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치매 노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치매 노인을 돌보는 가족의 66% 이상은 요통, 심장질환, 고혈압, 관절염, 소화기질환 등의 신체적 질환을 한 가지 이상 앓고 있었다. 또 돌봄 제공자의 감정은 무시되기 쉽지만 우울증, 불안, 죄책감, 무력감, 좌절감 등 심리적인 스트레스도 상당했다.
이서원 RCI-Korea 연구소장(44·고려사이버대 사회복지학부 교수)은 “가족이나 요양보호사 등 돌봄 제공자가 돌봄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과 체계적인 훈련을 하면 신체적 건강, 심리적 안정, 위기극복의 힘이 크게 증가한다”며 “돌봄 제공자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직무능력을 높이면 돌봄의 질이 향상될 수 있다”고 말했다.
RCI-Korea는 무엇보다 돌봄 제공자가 건강한 심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교육에 힘을 쏟을 예정이다. RCI-Korea에서 미국 RCI가 공동 개발한 자기돌봄과 관계회복, 케어기빙의 기초, 케어기빙 과정론 등 총 여섯 과목을 이수하면 ‘케어기빙 수료증(Caregiving Certificate)’를 수여한다. 이달에 필수과목인 ‘케어리빙의 기초’가 개설되고 나머지는 향후 3학기에 걸쳐 차례대로 신설된다. 자세한 내용은 02-6361-1977로 문의하면 된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 케어기빙(Caregiving) ::
노인, 장애인, 만성질환자처럼 스스로 자신을 돌보기 힘든 사람들을 돌보는 서비스를 말한다. 국내에서는 돌봄서비스, 사회서비스 등의 용어로 쓰이고 있다. 케어기버(Caregiver·돌봄 제공자)는 간병인, 요양보호사, 간호사 등 전문직업인뿐 아니라 가족도 포함한다.
■ 로절린 카터 여사 약력
△1927년 미국 조지아 주 플레인스 출생 △1946년 조지아 사우스웨스턴주립대 졸업.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결혼 △1970년 카터 전 대통령, 조지아 주지사 당선 △1977년 카터 전 대통령, 대통령 당선(1981년 퇴임) △1982년 카터 전 대통령과 공동으로 비영리 자선단체 ‘카터 센터’ 설립 △1987년 케어기빙 전문연구기관 ‘RCI’ 설립 △1991년 아동 조기 면역 캠페인 ‘Every Child By Two’ 전개 △자녀: 3남 1녀 △수상: 미국 대통령 훈장(카터 전 대통령과 공동 수상·1999년), 유엔아동기금 아동생존상(1999년), 미국 공중위생국장 메달(2000년), 전미 여성명예의 전당 추대(2002년), 미국 평화상(카터 전 대통령과 공동 수상·2009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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