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 유해발굴 본격 추진 1993년부터 日에 자료요청… 매장지 모르겠다는 말뿐 2005년 남북 공동조사단 감옥 인근 발굴 성과없어 ‘감옥 묘지’ 증언 다수지만 日이 다른 곳에 옮겼을수도
‘10시 20분 안(安)의 사체는 특히 감옥서(監獄署)에서 조제한 침관(寢棺)에 넣어 백포(白布)를 덮어 교회당으로 운구되었는데 이윽고 그 공범자인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3명을 끌어내어 특히 예배를 하게 하고, 오후 1시 감옥서의 묘지에 매장하였다.’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이 소장한 관동도독부(일제의 식민행정기관)의 안중근 의사 사형보고서는 1910년 3월 26일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안 의사를 묻었다는 ‘감옥서의 묘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결정적인 자료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까지도 “요청이 있으면 (자료 협조를) 검토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하면서 구체적인 유해 매장 위치를 밝히지 않고 있다.
○ 정부, 합동유해발굴추진단 구성
정부는 우선 일본과 중국 등을 상대로 외교적 노력을 벌여 이들 국가가 보유한 안 의사 유해 매장과 관련한 자료의 발굴에 나설 예정이다. 일차적으로 관련 자료를 모은 뒤 이를 토대로 적절한 유해 발굴 작업에 착수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외교통상부는 25일 국가보훈처가 관계 부처 및 전문가들과 함께 구성할 합동유해발굴추진단의 대외활동을 위한 지원반을 설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유명환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11일 방한한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일본 외상에게 안 의사 유해 발굴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오카다 외상은 “알아보겠다”는 답변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 관계자는 “일본 정부가 (안 의사 유해 관련) 자료가 ‘없다’고 하지 않고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어 여기에 주목하고 있다. 가능성이 1% 있더라도 끝까지 하는 게 우리 책임이다. 일본이 협조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일본 외무성의 소바시마 히데노부(側嶋秀展) 부보도관은 24일 “지금까지 외무성을 중심으로 관계 성청(부처)이 확인 작업을 해왔지만 유감스럽게도 매장지에 관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중국은 일본에 비해 협조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지만 안 의사가 황해도 해주 출신이어서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 과거 유해발굴 추진은 모두 실패
정부는 1993년부터 일본 정부에 안 의사 유해 매장지와 관련한 자료를 요청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언제나 ‘불가’였다. 2008년 3월 재차 일본 정부에 자료를 요구했지만 “문서정리 차원에서 찾아봐도 없더라”는 답변만 왔다.
1992년 중국과 수교를 한 뒤 일부 관련 자료를 발굴하면서 안 의사의 유해 매장 추정지에 대한 현지조사도 이뤄졌다. 남북은 2005∼2007년 여러 차례 실무 작업을 한 뒤 공동조사단을 꾸려 뤼순(旅順)감옥 현지를 조사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정부는 2008년 지질자원연구소 전문가 5명과 탐사장비를 동원해 뤼순감옥 서북쪽 야산(6600여 m²)에서 발굴 작업을 벌였으나 동물 뼛조각과 1000여 점의 일제강점기 도자기 외에는 사람 뼈를 발견하지 못했다.
○ 안 의사 유해는 어디에…
그렇다면 안 의사의 유해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뤼순감옥 인근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당시 민감했던 국제 분위기를 고려해 다른 곳으로 옮겼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뤼순감옥에서 처형당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이국성 씨(66)는 지난해 “열세 살 때 아버지와 함께 안 의사 묘역에 가본 적이 있다. 1940년대 뤼순감옥에서 근무한 일본인 의사 고가 하쓰이치(古賀初一)의 회고록에 기록된 안 의사 묘지 위치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이 씨가 입수한 일본인 의사의 회고록에는 ‘안중근 씨가 감옥 끝에서 300m 떨어진 묘지에 묻혔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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