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단계 사기… 中동포 4700여명 울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27일 03시 00분


“쓰는 만큼 번다” 유혹… 식당서 번 돈 모두 날리기도
내국인 등 1만400여명 540억 피해… 간부 5명 구속

“소비가 곧 소득입니다.”

평생 돈 쓰기를 무서워했던 중국동포 이모 씨(51·여)는 ‘돈을 쓰는 만큼 벌 수 있다’는 말이 꿈처럼 들렸다. 그는 어렵게 식당일을 해 번 돈을 쓰자니 가슴이 떨려 변변한 외식 한 번 못했었다. 지난해 12월 서울 동대문구 장한평역 근처의 P업체 강당에서 열린 사업설명회. 강당을 가득 채운 300여 명의 중국동포도 이 씨와 같은 꿈을 꿨다. 불법체류자인 중국동포 조모 씨(40·여)는 이미 그 꿈을 현실로 만든 사람이었다. 조 씨는 이미 다단계 판매원 가운데 최고인 ‘갤럭시’ 등급이었다. 설명회에 강사로 나선 조 씨는 “한 달에 2000만 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며 자랑했다.

몸이 아파 식당일을 그만둔 지난해 말. 식당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 중국동포는 이 씨가 식당을 그만둔 바로 다음 날부터 연락을 해 왔다. 밥 한 끼 먹자던 친구는 혼자만 알기 아까운 좋은 일자리를 소개시켜 주겠다며 이 씨를 장한평역 근처의 한 회사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불법 다단계 회사 P업체 사무실이었다. 수당을 받을 수 있는 다단계 판매원 중 최하위인 ‘컨슈머(CS)’ 등급이 되려면 110만 원 이상의 홍삼, 글루코사민 등 건강보조식품을 사야 했다. 이 씨는 식당일을 해 번 돈 980만 원을 고스란히 다단계 제품을 사는 데 날렸다.

P업체는 내국인 상대 영업이 부진하자 다단계의 불법성을 잘 모르는 중국동포를 노렸다. 실제로 중국동포들이 대거 영입된 2009년 매출은 전년도보다 360% 증가한 302억 원을 기록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업체에 속아 물품을 구매한 중국동포는 4700여 명. 이 업체는 한국인을 포함한 피해자 1만400여 명에게 540억 원을 받아 챙겼다.

이 업체는 중국동포들의 가려운 곳을 꿰뚫고 있었다. 다단계 판매원 모집 사업설명회를 열어 특정 직급 이상이 되면 매달 일정액을 연금 형식으로 받을 수 있다며 속였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던 중국동포들은 매달 꾸준히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이곳을 찾은 지 1년 만에 저는 ‘주니어디렉터’가 됐습니다. 이국땅에 와 밥 벌어 먹기도 급급하던 때가 엊그제인데, 지금은 한 달에 300만 원씩 꼬박꼬박 받고 있습니다. 웬만한 월급쟁이보다 낫지 않습니까?” 말솜씨가 뛰어난 중국동포 이모 씨(46·여)는 P업체 대표 강사였다.

업체는 공들여 올린 등급을 자녀들에게도 상속하도록 해주고, 곧 중국에 진출한다고 속여 중국동포들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회사의 주식을 나눠주는 등 ‘오너십’ 경영을 한다는 이야기도 솔깃했다. “한국에 와 노예처럼 시키는 일만 했는데 내가 주인이 되는 회사라니 마음이 갔습니다.” 이 씨도 당당한 회사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중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려 모은 돈을 P업체에 모두 맡겼다.

외국인조직범죄 서울남부지역 합동수사본부(부장 강신엽)는 26일 중국동포 등을 상대로 불법 다단계 영업을 해 수백억 원을 챙긴 혐의로 P사 대표 정모 씨(45) 등 5명을 구속 기소하고 이모 씨(46·여) 등 간부 5명을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단속을 피해 도주한 회사 설립자 문모 씨(52) 등 4명에 대해서는 출국금지하고 전국에 지명수배했다.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김철중 기자 tnf@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