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이건 군(16·서울 서초고 1)의 유일한 친구는 사슴벌레였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달려가 기르는 사슴벌레를
관찰했다. 직접 관찰일기를 만들어 ‘생김새는 어떤지’ ‘주로 어떤 것을 먹는지’ 등을 정리했다. 열성적인 모습에 가족은 이 군에게
‘곤충박사’란 별명을 붙여줬다. 하지만 학교에서의 이 군은 달랐다. 쉬는 시간에도 친구와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책상에 앉아 있는
조용한 학생으로 돌변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신설 학교로 전학 온 뒤 새로운 환경에 지나칠 정도로 민감했어요. 쉬는 시간에 애들이 말을 걸면 자연스럽게 대화하지 못하고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쟤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란 걱정에 말수가 적어졌죠. 나중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불편한 정도를 넘어 두렵게 느껴졌어요.”
새로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이 군은 공부와도 멀어졌다. 수업을 듣다 모르는 것이 생겨도 교사에게 질문하기는커녕 친구들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성적은 늘 하위권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 혼자 지내는 아들을 안쓰럽게 여긴 아버지가 이 군에게 먼저 다가왔다.
“어느 날, 아빠가 방으로 부르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중에 네 꿈을 이루기 위해선 원만한 교우관계와 공부실력이 꼭 필요하다. 중학교에 올라가선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공부도 해야 한다’고요.”
이 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피하다간 왕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극적인 자기 모습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중학교에서 꼭 이뤄야 할 최우선 과제를 이 군은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기’로 정했다.
중학교 등교 첫날, 이 군은 우선 대화에 적극 참여하기 위해 친구들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이 군은 “친구들이 하는 얘기는 대부분 성적에 대한 고민이었다”며 “이때 ‘내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되면 친구들과 대화하는 데 문제가 없겠지’라는 생각에 공부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 군의 공부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어떻게 공부를 시작해야 할지조차 몰랐던 것. 우선 학교 옆 서점에 가 “중간고사 공부를할 건데 문제집 한 권만 주세요”라고 말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문제집 주세요’라고 하지 않고 무작정 문제집 달라니까 주인아저씨가 ‘뭐 저런 대책 없는 애가 다 있어?’ 하는 눈으로 쳐다보더라고요(웃음). 거의 40분 동안 아저씨가 문제집 이것저것을 소개해준 끝에, 처음으로 내신대비용 문제집이란 걸 샀어요.”
집에 와서 문제집을 펼치는 순간, 이 군은 두 번째 난관에 부닥쳤다. 시험공부를 하기엔 기초가 부족했던 것.
그는 문제집의 모든 내용을 무조건 외우기 시작했다. 과목에 관계없이 문제집 맨 앞부분부터 외웠다. ‘열심히 공부해 소외당하지 않겠다’란 결심에 하루 8시간 넘게 책상 앞에 앉았다. 다음은 이 군의 회상.
“국어 내용정리 중 ‘탈무드 우화의 출전’이란 문장이 있었는데, ‘우화’가 뭔지도 모르고 ‘출전’이란 단어의 뜻도 모른 채 그냥 무조건 외웠어요. 그게 공부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죠.”
결과는 평균 86점으로 전교 460명 중 144등. 하위권을 탈출하니 뿌듯했다. 하지만 친구들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친구들이 ‘평균 몇 점이냐’고 저에게 물었을 때 ‘86점’이라고 대답하면 모두 깜짝 놀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무도 놀라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그것밖에 안 되냐?’며 저를 공부 못하는 애로 생각하는 친구도 있었어요.”
당황한 이 군. 이 정도로는 자신을 어필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그는 ‘더 치밀하고 완벽하게 공부하자’고 결심했다.
먼저 중1 1학기 중간고사 성적표를 분석했다. 암기가 통하는 사회, 과학은 각각 98점, 93점이었지만 문제는 수학, 영어. 모두 70점을 넘지 못했다. 문제와 풀이과정을 통째로 외우기만 하니 문제가 조금만 변형돼도 풀지 못했다.
고민하던 이 군은 반 1등의 공부법을 ‘벤치마킹’했다. 1등이 다니는 학원에 등록하고, 그 친구가 가진 문제집을 모두 샀다. 문제 풀기에 앞서 공식을 유도해 보고 개념을 이해하는 데 주력하는 1등의 모습을 보고 똑같이 따라했다. 이 군은 자기 방식대로 ‘빈칸 노트’도 만들었다. 교과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노트에 ‘빈칸에 들어갈 말은?’과 같은 빈칸 문제를 직접 만들어 쓰고는 풀었던 것.
기말고사 공부 계획도 과목별, 단원별로 구분해 세웠다. 시험 5주 전부터 이해가 필요한 수학을 먼저 공부하고 과학, 국어, 사회처럼 암기가 ‘통하는’ 과목은 시험 1, 2주 전부터 시작했다.
1학기 기말고사 결과는? 전교 460명 중 24등. 특히 수학에서 98점을 받은 것은 가장 큰 성과였다. ‘공부 잘하는 애’가 된 이 군을 대하는 친구들의 모습도 달라졌다. ‘공부 방법 좀 알려 달라’며 다가오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이런 성적은 중3까지 이어졌다.
“친구들이 먼저 저한테 다가오는 게 무섭진 않았냐고요? 전혀요. 이미 공부 로 자신감이 ‘업’된 덕분에, 초등학교 때완 달리 당당하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친구들과 대화할 수 있었어요.”
자신감은 공부를 하는 데 ‘무기’가 됐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서울대 부설 영재교육원 지구과학반에 합격하고, 3학년 때는 지구과학 올림피아드 동상을 받았다. 이 군이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지구과학. TV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나온 ‘행성과 행성 간의 충돌’을 다룬 시뮬레이션 영상을 보고 그 거대함과 웅장함에 푹 빠졌다.
“친구들과 토론하는 것을 좋아해요. 제 지식을 알려주기도 하고 친구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 과정이 정말 즐겁거든요. 지구과학 분야의 교수가 돼 더 전문적이고 다양한 지식을 나누고 싶어요.”
이승태 기자 st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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