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후 경기 화성시의 한 국밥집에서 만난 권기형 씨(29)는 씁쓸히 웃었다. 권 씨의 왼손 엄지손가락과 네 번째 손가락은 눈에 띌 정도로 짧아 보였다.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당시 참수리 357호 갑판 수병이던 권 씨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과의 전투 도중 왼손에 총알이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다. 고통과 함께 손이 너덜거렸다. 몽롱한 눈이었지만 동료들이 픽픽 쓰러져 가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리고 8년이 흘렀다.
○ “훈장? 장롱에 처박아 놓은 지 오래”
“보세요!” 권 씨의 팔뚝에는 20cm가 넘는 굵은 상처가 있었다. 6번의 수술을 통해 팔뚝에서 살과 피부를 떼어내 손가락을 붙였기 때문이다. 당시 권 씨가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하자 위문방문이 줄을 이었다. 2002년 대선을 앞둔 대통령 후보들이 직접 방문해 권 씨를 위로했다. 미스코리아들도 병원을 찾았다.
“사회 관심도 한철입니다. 6월이면 국가보훈처 같은 곳에서 ‘잘 지내냐’는 전화 오는 게 전부입니다. 저는 그 어떤 자부심도 느낄 수 없습니다.” 권 씨에게 남은 것은 명예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무직’ 신분뿐이었다. 한국농업전문학교(현 농수산대)에 복학했지만 농업 최고경영자(CEO)가 되겠다는 꿈은 손 때문에 접어야 했다. 일반회사에 원서를 냈지만 ‘그 손으로 뭘 할 수 있느냐’는 핀잔만 받았다. 유공자 경력을 인정받아 2008년 현금 운송회사에 취직했지만 지난해 계단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친 후 그만뒀다.
“훈장요? 지금은 장롱에 처박혀 있습니다. 전투에 참여한 것은 자랑스럽지만 ‘내가 괜히 군대 갔지’란 생각도 듭니다. 연평해전 이야기는 아예 하지 않습니다.”
○ “아빠 없는 아이, 남편 없는 아내”
현재 보훈처에 등록된 전공사상자 수는 20만 명(2월 기준)이 넘는다. 부상자들과 유족들은 “남는 건 망가진 몸과 풍비박산된 가정뿐”이라고 토로했다. 부산 해운대경찰서 소속 정덕길 경위(54)는 지난해 4월 범인 검거에 나섰다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후 반신불구가 돼 재활치료가 필요했지만 치료비가 만만치 않았다. 재활치료 보조기 등은 건강보험 비급여 항목이라 스스로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건 부상자뿐 아니라 유족들도 마찬가지다. 박경조 해경 경위(당시 48세)는 2008년 9월 중국 어선을 단속하다 공격을 당해 실종된 후 17시간 만에 숨진 채로 발견됐다. 6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자택에서 만난 박 경위의 부인 이선자 씨(47)는 “아빠가 들어온 날이면 아이들이 신이 나 집이 들썩들썩했는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18세, 12세인 두 아들은 2008년 고향인 전남 목포시를 떠나 낯선 서울로 이사 온 뒤 명랑하던 성격이 많이 사라졌다. 이 씨는 남편 사망 후 보훈처 지원금, 연금 등을 받아 생활하고 있지만 중고교생 아들의 교육비 등 생활비가 부족해 걱정이 크다.
경남 마산시에 사는 김영희 씨(56·여)의 남편 서준호 소방관(당시 46세)은 2000년 경남 창원시 성주동에서 대형화재를 진압하다 순직했다. 사라진 남편의 자리를 채운 것은 월 연금 60만 원뿐이었다. 이후 김 씨는 식당일을 하며 두 딸과 아들을 키워 왔다. 고된 노동으로 고혈압이 악화됐고 허리와 등이 아파 4년 전부터 식당일도 그만뒀다.
○ “따듯한 시선이 필요해요”
2002년 제2연평해전 이후 보상체계가 개선돼 군인이 순직할 경우 가족들은 1억 원 안팎의 ‘군인사망보험금’을 받는다. 경찰, 소방관 등도 비슷한 수준이다. 예전보다 보상 수준은 나아졌지만 유족들은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고 자녀교육 등을 체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전문가들은 군인이나 경찰, 소방관이 업무 수행 중 사망하거나 부상할 때만 반짝 관심을 갖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국인들의 영웅에 대한 정서는 ‘특별한 능력과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사람’에 가까워 평범한 경찰, 소방관이 목숨을 건 행동을 하다 사망하면 ‘희생자’로 규정하고 동정을 보내다 금방 잊어버린다”고 지적했다.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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