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1심 무죄]“곽씨 위기모면용 진술… ‘골프채’ 등 나머지 판단 필요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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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10일 03시 00분


■ 재판부, 뇌물수수 혐의 무죄판결 안팎

진술 일관성 없고
뇌물액수 세차례나 번복
‘전달방법’도 오락가락

檢강압수사 의혹
고위험군 환자 심야조사
재판장 조목조목 지적


한명숙 전 국무총리(앞줄 오른쪽)가 9일 무죄를 선고받은 뒤 정세균 민주당 대표(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등과 함께 서울중앙지법 청사를 나서면서 이해찬 전 총리(앞줄 왼쪽)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전영한 기자
한명숙 전 국무총리(앞줄 오른쪽)가 9일 무죄를 선고받은 뒤 정세균 민주당 대표(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등과 함께 서울중앙지법 청사를 나서면서 이해찬 전 총리(앞줄 왼쪽)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전영한 기자
“한명숙 전 총리의 뇌물 수수 의혹 사건은 돈을 건넸다는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의 진술이 유일한 직접 증거인데 진술의 신빙성과 일관성, 합리성 등이 모두 떨어집니다.”

9일 오후 한 전 총리의 선고공판이 열린 서울중앙지법 중법정. 1심 재판을 맡은 김형두 부장판사가 30분가량 102쪽에 달하는 판결문을 요약해 읽어나가던 중 ‘곽 전 사장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대목이 나오자 법정 안은 일순간 술렁거렸다. 한 전 총리의 지지자들은 악수를 건네며 무죄를 확신하는 듯 미소를 주고받았다. 이후 50분가량 선고가 이어졌지만 결론은 무죄였다. 한 전 총리가 골프채 선물을 받았다는 검찰의 정황 증거 주장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조차 없었다. 곽 전 사장이 5만 달러를 건넸다는 말을 믿을 수 없는 만큼 다른 정황 증거는 따져볼 가치가 없다는 취지였다.

○ 오락가락 진술 믿을 수 없어

대법원은 뇌물사건에서 금품을 건넨 사람의 진술만으로 유죄를 인정하려면 진술의 합리성과 객관적 상당성, 일관성 등이 담보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뇌물 공여자의 인간 됨됨이와 진술로 얻게 되는 유익 등을 살피고 협박이나 회유에 의한 진술인지 등을 따져봐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김 부장판사는 이 같은 대법원의 판례에 맞춰 곽 전 사장 진술의 문제점을 하나씩 지적해 나갔다. 우선 곽 전 사장의 진술이 오락가락한 점이 도마에 올랐다.

곽 전 사장은 지난해 11월 검찰 조사 초기에는 수사 검사에게 “10만 달러를 건넸다”고 말했다가 부장검사에게는 “주임검사가 무서워 거짓말을 했다”고 털어놨다. 횡령 혐의로 구속된 뒤에는 “3만 달러를 줬다”고 얼버무리다 “2006년 12월 20일 총리공관에서 5만 달러가 든 돈봉투를 직접 건넸다”고 또다시 말을 바꿨다. 하지만 지난달 11일 공판에서는 “돈봉투를 의자에 놓고 나왔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재판부는 “곽 전 사장이 검찰에 ‘살려 달라’는 말을 자주하며 여러 차례 말을 지어낸 것 등을 볼 때 자기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쉽게 할 성격임을 알 수 있다”며 인간 됨됨이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판단했다.

○ 검찰의 강압수사 의혹도 제기

재판부는 곽 전 사장의 뇌물 공여 진술이 검찰의 강압 수사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강한 의구심을 나타냈다.

심혈관계 질환 등을 앓고 있는 곽 전 사장은 재판 과정에서 “구치소에선 앞문으로 왔다가 (시체로) 뒷문으로 나간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며 극단적 공포감을 자주 표현했다. 재판부는 “고령의 고위험군 환자인 곽 전 사장을 오전 2시까지 조사했으면서도 ‘고생했다는 취지로 면담한 것일 뿐’이라는 검찰의 주장은 납득할 수 없다”며 “뇌물을 건넨 사실을 진술한 뒤에는 조사가 오후 6시 반쯤 일찍 종료된 점도 진술의 임의성(자발성)을 의심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검찰이 중요 진술자료를 기록에 넣지 않은 점도 문제 삼았다. 곽 전 사장은 법정에서 “검사님이 ‘너희들 전주고 나온 놈들 대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정치인 대라고 그랬고…”라며 검찰이 진술을 강요한 듯한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은 검찰 조서에 빠져 있었다. 재판부는 “뇌물을 건넸다는 곽 전 사장의 최초 진술과 이후 이를 부인한 진술이 검찰의 수사 조사에 기록돼 있지 않다”며 나머지 자백 진술의 임의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곽 전 사장이 뇌물 제공 사실을 진술한 대가로 횡령 혐의를 덜어 준 것 아니냐는 의심도 제기했다. 재판부는 “이국동 전 대한통운 사장은 비자금으로 조성된 전체 금액인 155억 원을 횡령했다고 기소한 반면 곽 전 사장은 비자금 83억 원 가운데 사적으로 사용한 37억 원에 대해서만 횡령한 것으로 기소했다”며 “곽 전 사장이 검사에게 협조적인 진술을 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 엘리트 재판장의 사법적극주의 공판

재판장인 김형두 부장판사(45·사법시험 29회)는 법원행정처 심의관과 대법원 재판연구관 등을 거친 대표적인 엘리트 법관이다. 지난해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로 있을 때 한 전 총리의 체포영장과 곽 전 사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해 이 사건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이론과 실무에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법원의 우월적 위상을 강조하는 사법적극주의자로 평소 검찰의 권력을 제한해야 한다는 소신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공판에서도 검찰 측 증인신문의 상당 부분을 대신 직접 묻는가 하면 검찰의 피고인 신문권을 제한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




▲동영상 = 무죄받은 한명숙 전 총리, 법원 나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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