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 3면 4·18 고려대 시위 소식을 담은 ‘고대생 1명 피살?’이라는 제하의 기사(왼쪽)와 기사의 주인공 한상철 씨.
고려대 4·18시위를 다룬 1960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 3면에는 ‘고대 데모대 깡패단습격으로 유혈 소동’ 기사와 함께 ‘고대생 1명 피살? 40여명부상·취재진기자 6명도’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한편 이날 데모에서는 천일백화점 앞에서 깡패들에게 폭행을 당해 고대학생들만도 십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고대 한상철 군은 실신된 채 깡패들에게 끌려가 죽었다는 말도 있는데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나중에 확인됐지만 당시 고려대 화학과 2학년이던 한상철 씨(69)는 살아 있었다. 열아홉 살 청년이던 한 씨는 이제 염색으로도 흰머리가 감춰지지 않는 노인이 됐다.
“누군가 제가 실신해 쓰러진 것을 보고 한 말이 잘못 전해졌나 봐요. 나중에 친구들이 ‘한번 죽었으니 오래 살겠다’고 농담을 건네더군요.”
16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인근 커피숍에서 만난 한 씨는 감회에 젖어 1960년 당시의 이야기를 꺼냈다. 한 씨는 자신이 4·19혁명 대열에 참여했던 일은 몇몇 친구들을 제외하면 직장 동료뿐 아니라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18일 어둑어둑할 무렵이었어요. 청계천 4가에서 깡패들에게 방망이 같은 뭔가에 ‘퍽’ 하고 갑자기 왼쪽 얼굴을 얻어맞고 쓰러졌어요. 함께 시위에 참가했던 친구 2명이 저를 들쳐 메고 근처 병원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30분 이상 정신을 잃었어요. 얼굴을 10여 바늘 꿰맸을 뿐 깨어나니 괜찮더라고요.”
한 씨의 왼쪽 광대뼈 아랫부분에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살이 파인 흉터가 남아 있다. 이날 시위에 나선 고려대 학생들이 자유당의 하수인인 깡패들에게 습격당했으며, 한 학생은 맞아 죽었는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면서 학생과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를 계기로 서울 시내 10여 개 대학의 학생들도 다음 날인 4월 19일 궐기했다.
한 씨는 19일 죽어가는 학우를 바라보는 마음은 참담했지만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냈을 때는 가슴이 뿌듯함으로 가득 찼다.
한 씨는 “4·19혁명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북한이나 남미의 후진국처럼 됐을 것”이라며 “지금의 젊은이들이 누리는 자유는 이전 세대의 희생 위에 이룩된 것임을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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