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자와 공모 사채업자 끼고 CD 편법 발행
분식회계-횡령 은닉에 악용… 17명 적발 5명 구속
건설 시행업을 하는 김모 씨는 2008년 12월 대한건설협회가 매년 실시하는 시공능력 평가에 앞서 자본금을 늘릴 방법을 고민하다가 브로커 신모 씨(57)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명동 사채업계의 큰손으로부터 100억 원짜리 양도성예금증서(CD)를 받아 빌려줄 테니 수수료 명목으로 1억 원당 170만 원을 달라는 것이었다. 자본금이 적어 시공능력이 낮은 것으로 평가받을까봐 걱정하고 있던 김 씨는 신 씨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신 씨는 명동 사채업자와 함께 은행을 찾아 사채업자 명의로 계좌를 개설했다. 은행에서는 만기에 지급할 이자를 뺀 CD 발행가 96억8600만 원을 송금 받은 뒤 액면가 100억 원짜리 무기명 CD를 발행해줬다. 그 자리에서 사채업자는 CD 원본은 자신이 갖는 대신 CD 복사본과 발행확인서를 1000만 원에 신 씨에게 넘겼다. 신 씨는 명의가 따로 적혀 있지 않은 CD 복사본과 발행확인서를 이용해 김 씨 회사의 자본금이 100억 원이 넘는 것처럼 분식회계를 해 시공능력 평가를 받게 했다.
사채업자는 곧바로 CD 원본을 평소 알고 지내던 H증권 신모 본부장(48)을 통해 2300만 원 할인된 가격으로 자산운용사에 팔았다. 이 과정에서 사채업자는 단 몇 시간 CD를 발행해준 대가로 이자 1000만 원을 받았고, CD를 팔아 준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도 3700여만 원의 중개수수료를 챙겼다. 브로커 신 씨는 김 씨에게서 수수료 명목으로 받은 1억7000만 원 가운데 CD 원본 매각수수료 등을 제외한 1억2000만 원을 챙겼다.
신 씨의 범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같은 시기 8억 원의 회삿돈을 빼돌려 고민에 빠진 한 제조업체 대표 우모 씨(53)에게 접근해 같은 방법으로 CD 8억 원어치를 발행해줬다. 우 씨는 빼돌린 8억 원의 회삿돈으로 CD를 산 것처럼 꾸며 횡령 행위를 감추려다 덜미를 잡혔다. 검찰이 분식회계와 가장납입, 횡령 은닉 등의 수단으로 ‘제3자 명의 CD’가 이용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신 씨 등 브로커 26명의 조사에 나선 것. 이들은 재정상태가 좋지 않은 건설업체 등에 무작위로 팩스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 이 같은 수법을 제안하고 CD 발행을 원하는 업체를 모집했다.
‘3자 명의 CD 발행’ 비리 사건을 수사해온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1부(부장 전현준)는 19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알선수재 등의 혐의로 신 씨 등 5명을 구속기소하고 채모 씨(56) 등 브로커와 회사 대표 등 12명을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이 이번에 적발한 이들 브로커에 의해 발행된 제3자 명의 CD의 액면가는 2700억 원대에 달했다. 전현준 부장검사는 “제3자의 CD로 자금력이 뻥튀기 된 회사인 줄 모르고 투자에 나선 선의의 피해자가 많다”며 “시공능력을 평가하거나 금융감독원에서 재무제표를 감사할 때 CD 사본이 아닌 원본을 반드시 확인하도록 관련 법률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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